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방석천 Sep 28. 2021

그런데 왜 나는 기억력의 한계를 느끼는가?

단기기억과 장기기억

가슴 철렁했던 기억이젠 시간이 꽤 흘렀다. 관악산에 갔다가 일어난 일이었다. 관악산은 바위산이다. 곳곳이 돌로 되어 있어 악산(岳山; 바위 악)이라고 한다. 관악산, 북악산, 설악산 등이 다 바위산, 악산이다. 자칫 발끝이 슬쩍 걸리기라도 하면 그대로 큰 실수로 이루어지기 쉬운 산이다. 특히 내리막 길에서 발걸음을 조심해야 한다. 그래서 관악산을 오르내릴때는 ‘주의하자’는 생각을 늘 하지만 익숙해지다 보면 그저 구두선이 되는 경우가 많다. 그날도  해가 저물기 시작해서 서두르며 내려오고 있었다. 그런데 발끝이 슬쩍 스치더니 몸의 중심이 앞으로 가며 넘어지는 것을 발을 빨리 내디디며 막으려 했으나 한 두 걸음 나가다 굴렀다. 잠시 정신을 차린 후 다친 곳은 없는지 살펴보았다. 여기 저기 얼얼하지만 크게 다친 곳은 없는 듯하였다. ‘다행이다.’ 몸을 천천히 움직이며 일어나 보니 한길이 훨씬 넘어보이는 낭떠러지 일보 직전에 멈춘 것이었다. 두고두고 생각해도 가슴 철렁해지는 실수였다,


실수는 경고얼마전에도 냉장고에서 그릇을 꺼내다가 위에 놓인 유리그릇이 미끌어 떨어지며 깨졌다. 실수인가? 실수라고 생각했었는데 다 치우고 앉아서 조용히 생각하니  

   

‘오늘 내가 좀 서두르는 마음이 있었어.’ 

‘내가 요즈음 서두르고 있어. 고쳐야 해.’

라고 실수라며 넘어가 버리기는 찜찜하다.     

 

‘이렇게 계속 서두르면 안돼’

라는 오히려 경고로 느껴진다.     

 

실수와 기억의 한계무엇을 실수라고 하는가? 변명이라고도, 재수가 없어서라고도, 우연이라고도 하지만 곰곰이 생각하면 다 이유가 있는 것 같다. 失手는; 한자를 그대로 해석하면 “手(손)를 놓침“이다. 머리로는 생각했는데 ‘손이 따라주지 않은 것‘ 정도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즉 생각과 행동의 괴리? 아니 괴리는 아니고 단지 약간의 시간 차가 만드는 문제이다. 즉 생각이 행동으로 나타나려면 일정 시간이 필요하다. 평소에는 눈에 띄지 않지만 바쁠 때, 서두르는 마음일 때, 빠른 동작중에, 나이가 들어갈 때, 이들 효과가 드러나게 된다. 그래서 실수는 이런 경우 들에서 대부분 발생한다. 이 시간차는 우리가 생명체라는 것을 확인하게 하는 현상이다. 신경 액손(축삭)(용어설명; 신경구조)에서 신호가 전달되는 속도가 유한하기 때문이다. 이 전달 속도는 신경 종류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지만 발과 신호를 통하는 대퇴 신경의 경우 약 30 m/s이다. 1초에 30미터의 속도이다. 인간의 달리기 속도보다는 빠르나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뇌에서 발로 신호가 전달되는 데 적어도 0.1초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     


시험을 보고 온 아이가 “내가 아는 건데 틀렸어."라고 할 때, 아이는 풀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보니 틀렸다. 단순히 우연일까? 아이만 그런 것인가? 그러나 아이도 잘 생각해보니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았다는 것을 느낀다. 아이가 생각하기에는 분명히 내가 할 수 있는 문제였는데 어디선가 미끄러진 것이다. 차분히 체크하지 못하고 시험시간에 쫓기다보니 서두르며 지나쳐버린 것이다. 실수는 바쁠 때, 이런 착오에서 생기게 마련이다. 된다고 쉽게 생각해버린 것이다. 평소 경우였다면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인데 시간에 쫓기거나 마음이 급해지면 무의식적으로 상황을 아전인수로 생각하며 지나쳐버린다. 나의 경우도 대부분의 실수가 그랬다. 


우리가 두뇌의 한계를 느끼는 때는 아마 이러한 경우들일 것이다. 이럴 때는 두뇌의 ‘무한성‘이라는 말이 실감이 나지 않는다. 나는 늘 기억력이 좋지 않다고 느껴왔다. 내가 자연과학 쪽으로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한 이유 중 하나도 내가 기억력의 한계를 느껴서였다.     


단기기억 한계와 혼동앞에 쓴 글들에서 여러 번, 우리 두뇌의 무한성에 대해 강조하였다. 그런데 왜 나는 내 기억의 한계를 느끼곤 하는가? 왜 나는 두뇌의 무한성이라는 말이 실감나지 않고 늘 기억력이 좋지 않다고 느꼈을까? 그러나 무한한 두뇌의 기억 용량은 이렇게 한계를 느끼는 뇌의 기억용량과는 다른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트럭에 물건을 싣는다고 하자. 이 트럭은 대형 트럭이어서 엄청나게 많은 양을 실을 수 있다. 그러나 한 번에 들어올려 실을 수 있는 짐의 양은 한계가 있다. 나는 쌀가마 하나도 제대로 들어올릴 수가 없다. 내가 느끼는 두뇌의 한계는 짐을 한 번에 들어올릴 수 있는 무게의 한계와 유사하다. 이때 트럭에 실을 수 있는 양은 우리의 장기기억에 해당하고 내가 간신히라도 들어올릴 수 있는 쌀 한 가마 무게의 양은 우리의 단기 기억, 즉 우리가 주의를 집중했을 때, 커버할 수 있는 기억의 한계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산을 오르다가 ‘푸드득’하고 한 마리 새가 날아오른다. '어떤 새인가?' 보려고 새에 주의를 집중한다. 그 순간 나의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새 한 마리일 뿐 산이나 나무나 구름은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다. 새 이외의 다른 것은 인식되지 않는다. 이렇게 우리가 주의를 집중할 수 있는 대상은 아주 좁은 범위의 대상뿐이다. 이 좁은 시야가 우리의 단기기억 용량을 말해준다. 단기기억의 한계를 장기기억의 한계로 생각하는 것은 ‘내가 들어올릴 수 있는 한계’와 ‘트럭의 한계’를 혼동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아무리 단기기억이 부족하다고 느껴도 우리 두뇌의 기억용량은 무한하다는 말은 틀리지 않다.     


한계를 극복한 위대한 예들즉 우리가 실감하는 기억의 한계는 장기기억 한계라기보다는 단기기억 (cpu memory, 작동기억, 임시기억)의 한계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보통 우리가 실감하는 이러한 한계를 두뇌의 한계라고 오해한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는 단기기억 또는 작동기억의 한계라고 봐야 한다. 두뇌의 무한성을 말할 때, 단기기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장기기억의 무한성을 말한다. 이러한 단기기억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무한한 잠재력을 펼칠수 있을만큼 우리의 기억은 엄청난 기억용량을 가지고 있음을 과학은 밝히고 있다. 우리 두뇌는 심각한 장애에도 불구하고 한계를 극복하고 위대한 성취를 이룬 많은 예들을 역사적으로 그리고 동시대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전 06화 두뇌 메세지는 좋으나 나와는 거리가 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