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의 두려움과 희망 사이에서_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어렸을 적 엄마의 모습은 나를 항상 귀찮아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자식으로서 부모에게 할 도리가 있듯, 엄마도 부모로서 자식에게 할 최소한의 도리는 한 것 같다. 지금 내가 이렇게 건강하게 글을 쓸 수 있는 걸 보면 말이다. 아무리 어릴 적에 충만한 사랑을 받고 자란 사람도 그것을 의식하며 살지는 않는다. 그 시절에 받은 사랑은 오로지 무의식에 남는 것이므로.
그렇게 내 무의식이 외로워 봤자지 하면서도, 가끔씩 나는 정말 뼛속까지 외로운 사람일까.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러다 금세 그런 생각조차 귀찮아하는 걸 보면 다행인가 싶다가도, 뭔가 좀 슬프다. 외로움마저 귀찮아져 버렸다니. 사실 그런 사람이 온 에너지를 들여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을까 싶은 거다.
그나마 희망적인 것은 여태껏 누군가를 만나고 헤어짐을 반복하면서, 사랑도 하고 상처도 받고 나름대로 치유하는 과정을 겪는 자신을 발견했다는 점이다. 받아본 적도 없는 사랑을 기대하진 않을 테니 말이다. 인간에 대한 기대가 전혀 없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기대만큼 실망할 자신이 두려웠을 뿐이었다는 걸 알았다. 그러고 보면 어릴 적 내가 엄마를 기억하는 모습과 진실은 조금 다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계에 대한 포기보다는 두려움이 훨씬 희망적이라고 자위하면서 나름의 소망을 말해보자면,
이제는 나를 구구절절 설명할 사람보다, 굳이 내가 설명하지 않아도 나를 오랫동안 지켜보면서 알아가게 될 사람이 필요하다. 어차피 나를 내가 설명해봤자 믿어줄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을뿐더러, 혹여나 그 설명과 조금이라도 동떨어진 나를 보게라도 되면 나는 거짓말쟁이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서로를 번지르르한 말이 아닌, 행동으로 증명하는 사이가 되는 것. 그래서 실망스러운 말 몇 마디에 흔들리지 않는 것.
그리고 말과 행동이 완전히 일치하는 좋은 사람이 될 때까지 서로를 기다려주고, 응원해주는 것.
서른다섯, 지금의 내가 가장 꿈꾸는 관계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