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殊塗同歸(수도동귀) : 방법은 달라도 결과는 같다
殊塗同歸(수도동귀) : 방법은 달라도 결과는 같다
- [삼국지강의(品三国)-2](2007), 이중텐, 홍순도 옮김, <김영사>, 2007.
"... 어떤 인물을 분석할 때 '조건과 정세'를 먼저 분석하는 것이 '도덕적인 분노'를 표시하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마르크스의 이런 역사관과 방법론은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즉 루이 보나파르트의 정변에도 적용되고 삼국시대의 역사를 분석할 때도 적용이 가능합니다...
...
그들 모두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위-촉-오가 삼국정립을 이미 형성한 이상 어느 누구도 다른 누구를 삼켜버릴 수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 이중텐, [삼국지강의(品三国)-2], <결문 : 장강은 여전히 동으로 흐른다>, 2007.
제갈량이 별볼일 없는 유비를 만나 '융중대책'을 건의했을 때, 후한 말기 천하를 유비와 조조, 그리고 손권이 '삼국' 구도를 정립하여 그 누구도 다른 누구를 쉽게 제압할 수 없는 정세를 만들자는 이른바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는 새로운 대책은 아니었다.
손권의 책사 노숙 또한 같은 책략을 제출했는데, 손권-조조-유비의 '삼국'에서 유비 대신 형주자사 유표를 상정한 점이 달랐다.
유표는 한(漢)나라 황족이었으나 천하통일의 웅대한 기개는 없었다. 노숙이 유표를 상정한 이유는 삼국의 주요 전략적 요충지가 바로 형주였고, 유표가 이 지역에 할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갈량이 융중에서 '천하삼분'을 유세할 때 유표 대신 유비가 우선 형주를 장악하고 이를 기반으로 하여 강동의 손권과 화해하고 중원의 조조와 대치하면서 서쪽의 익주를 차지한 후 근거지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 '융중대'의 요지였다. 실로 제갈량은 동오의 노숙과 뜻을 같이 하여 형주를 빌리고 조조가 도발한 적벽대전에서 승리하면서 관우가 형주를 굳건히 지키는 가운데 서쪽의 파촉지역인 익주의 유장 세력을 진압하면서 근거지를 확보한 후에 조조 사후 그의 아들 조비가 한나라 헌제로부터 선양받아 황제를 칭하고 조위를 건국한 이듬해 유비는 파촉땅에서 황제로 즉위한다. 촉한의 건국이다. 얼마 후 천하통일의 뜻은 크게 없이 강동 지역에 웅거하려던 손권까지 황제를 칭하면서 조위-촉한-동오의 삼국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나관중의 소설 [삼국연의] 전반부에서 활약하는 후한 말기 군벌들은 사실 '삼국지' 이야기의 서막이었다. 조조와 유비, 손권이 피터지게 경쟁하던 시기는 북방의 원소도 있었고, 남방의 원술, 형주의 유표, 떠돌이 여포 등도 쟁쟁했다.
'삼국지' 3대 대전쟁은 원소와 조조의 북방 '관도대전', 조조와 유비-손권 연합군의 중원 '적벽대전', 조조 사후 조위-촉한-동오 시기 촉한 황제 유비와 동오 황제 손권의 '이릉대전' 세 전쟁이다. 마지막 이릉대전에서 대패한 유비가 죽은 후 삼국 정세에서 촉한 승상 제갈량이 굳은 의지로 조위에 대항해 수차례 시도한 '북벌' 전쟁이 [삼국연의]의 후반부 이야기다.
조위의 사마의와 대결하던 제갈량이 오장원에서 별이 된 후 사마씨의 진나라가 조위를 멸망시키고 손권의 자식들이 지키던 동오까지 접수하면서 사마의의 손자 사마염이 '진(晉)나라' 황제가 되어 천하통일을 이루는 장면이 소설 [삼국연의]의 마지막 장이다.
그렇게 청나라 모종강 판 [삼국연의]의 첫 문장, '천하대세 분구필합 합구필분(天下大勢, 分久必合, 合久必分)'은 실현된다. 한나라로 통일된 천하가 삼국으로 분열하고 또 다시 진나라로 재통일된다는 역사의 경향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천하는 분열이 오래되면 반드시 통일되고 통일이 오래되면 또 필히 분열된다.
이것이 역사의 '변증법'적 경향성이며, 우리가 아는 중국 '삼국지'의 주요 정세다.
"... (관도-적벽-이릉대전)... 이 세 전쟁은... 모두 전쟁을 개시한 쪽의 실패로 끝났다는 것... 이들의 실패 원인... 정답은 '시대의 변화' 때문이었습니다."
- 이중텐, [삼국지강의(品三国)-2], <결문>, 2007.
중국의 역사가 이중톈(易中天)은 2006년 [품삼국(品三国)]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삼국(三国)'을 '품평(品評)'했다. 이 책은 2007년 국역 [삼국지강의]로 소개되었고, 이중톈은 2007년에 [품삼국] '하(下)권'을 출간한다. 2권은 같은해 우리나라에 [삼국지강의-2]로 번역된다.
[삼국지강의-1], 즉 [품삼국] '상(上)권'은 진수의 [삼국지]를 비롯한 정사와 나관중의 [삼국연의] 소설을 오고가며 역사와 문학의 경계에서 '삼국' 시대를 평가했다.
https://brunch.co.kr/@beatrice1007/92
[삼국지강의-2], 즉 [품삼국] '하(下)권'은 이중톈의 본격적인 역사관을 바탕으로 한다.
이중톈의 역사관이란 단도직입적으로 마르크스주의 역사유물론이다.
역사적 사건과 인물을 현상적인 '도덕적' 관점에서가 아니라 '조건과 정세'([삼국지강의-2], <결문>)에 철저히 기반하여 '품평'한다.
https://brunch.co.kr/@beatrice1007/334
위에서 설명한 대중적인 역사적 경향성은 물론 이중톈 본인의 전공인 '위-진 남북조'와 '제2 제국'인 '수-당' 시대의 특징인 '사족(士族)'과 조조와 유비, 손권의 특징인 '서족(庶族)'간에 벌어진 일종의 '계급투쟁' 또는 '계급전쟁'으로 규정한다. 이중톈이 [삼국지강의] 2권의 <결문>에서 삼국지의 역사를 평가하면서 칼 마르크스의 [프랑스혁명사] 3부작 중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을 떠올린 이유가 바로 그의 유물론적 역사관을 웅변해준다.
1848년 프랑스 2월 혁명 후 부르주아 '제2 공화국'이 들어섰으나 금세 나폴레옹의 조카 나폴레옹 3세가 뜬금없이 대통령에서 황제가 되는 사건은 그저 '비극'의 '희극'적 재현만이 아니라 1848년 혁명 후 부르주아 계급이 혁명의 동력이었던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배반하고 양대 계급의 세력이 어느 한쪽의 압도적인 승리 없이 세력 균형을 이루고 있던 '조건과 정세'에서 등장하는 독재권력의 결말이었던 것이다.
안토니오 그람시가 [옥중수고]에서 말한 '케사리즘'의 배경인 고대 로마 제정과 공화정의 조건에서 등장한 '시저(케사르)'가 그랬고, 우리나라 독재자 딸 박근혜 정권의 등장이 그랬다.
https://brunch.co.kr/@beatrice1007/33
"삼국시대 지도자들의 용인술 특징을 다음의 열두 자로 정리하고자 합니다. 바로 '조이지(操以智), 권이정(權以情), 비이의(備以義), 양이법(亮以法)'입니다. 해석하면 조조는 지혜, 손권은 정, 유비는 의리, 제갈량은 법으로 사람을 썼다는 얘기가 됩니다."
- 이중텐, [삼국지강의(品三国)-2], <45강. 하늘 같은 정, 바다 같은 한>, 2007.
후한 말 황제 중심의 '제국'이 무너지면서 '사족', 즉 사대부 선비와 '명사' 등이 사회적 영향력을 떨치게 되고 원소 같은 '사족지주계급'이 구체제를 복원하고자 할 때 등장한 조조와 유비, 손견이나 손책-손권 형제는 일종의 '혁명가'였다. 그들 삼국지 영웅들은 '사족' 기득권이 아니었다. 환관의 양자 집안 조조와 황실의 후예라고는 하나 짚신과 돗자리를 팔던 유비, '사족' 집안 원술의 수하였던 손견은 '사족'보다 아래인 평민 '서족'이었다.
"동오의 손권이 마주쳤던 사족(士族), 명사(名士)들과의 모순 관계는 조조의 조위나 유비, 제갈량의 촉한에도 존재했다. 왜냐하면 위-촉-오 삼국은 모두 사족 출신이 아닌 인물이 건국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 역시 사족지주계급의 정권을 건국할 뜻이 없었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그들의 건국 역정을 평탄하지 못하게 했다. 더 나아가 그들의 정권을 멸망으로 이끌었다."
- 이중텐, [삼국지강의(品三国)-2], <48강. 방법은 달라도 결과는 같다> '서문', 2007.
'서족' 조조가 '사족' 원소를 관도대전에서 이긴 사건은 '사족지주계급'과 권문세가의 기득권을 제압한 일종의 '혁명전쟁'이었다.
'사족' 유표 세력을 누르고 형주를 차지한 후 '형주 그룹'을 주력으로 서진하여 '익주 세력'의 '사족'들을 흡수한 유비와 제갈량 또한 '사족지주계급'에 대항한 '서족' 평민 혁명군 지도자였다.
북방에서 내려와 강동의 '사족지주계급'과 타협하여 동오를 건국한 후 관우와 유비를 패배시킨 육손과 같은 '사족'을 결국 숙청한 손권 또한 '혁명가'는 아닐지라도 '서족' 정권의 대표자였다.
그렇게 '사족지주계급'의 기득권에 대항한 이들 '삼국지 서족 혁명가'들은 결론적으로 사마씨의 '사족지주계급'에 의해 차례로 패퇴되는 동일한 최후를 맞게 되지만, 각자의 방법은 달랐다.
https://brunch.co.kr/@beatrice1007/326
이중톈의 '품평'에 의하면, 이들의 용인술은 '조이지(操以智), 권이정(權以情), 비이의(備以義), 양이법(亮以法)'의 열두 글자로 정리되는데, 조조는 '사족' 모사 순욱은 물론 여러 세력을 두루 아울러 쓰는 지혜, 손권은 자기 세력 내 끈끈한 정, 유비는 관우와 장비 등 의형제간의 의리, 제갈량은 군대를 부리는 데는 미흡했으나 변방의 파촉 지역에서 그나마 법치에 의한 공정한 정치를 통해 '사족'인 익주 세력을 제압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결국, 이들의 다른 길은 같은 결말을 향했다. 다시금 '사족지주계급'인 사마씨에 의해 싹쓸이를 당했던 것이다.
이후 5호16국의 역동적 시기를 지나 위-진 남북조 시대가 되면 완연한 '사족'의 시대가 온다. 이중톈은 이를 '위진풍도'라는 문화로 소개하기도 한다.
https://brunch.co.kr/@beatrice1007/213
"투쟁의 결과는 당연히 서로 달랐습니다. 조위는 사족을 방치했습니다. 손오는 적당하게 타협했습니다. 촉한은 사족과의 충돌을 끝까지 견지했습니다. 촉한이 가장 먼저 멸망한 것은 그래서였습니다. 조위 역시 방치했기 때문에 멸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나마 손오는 조금 나았습니다. 타협한 탓에 목숨은 겨우 연명해 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멸망이라는 운명을 되돌릴 수는 없었습니다. 그 다음 들어선 (사마씨의) 진(晉)나라가 철저한 '사족지주계급 정권'이었기 때문입니다."
- 이중텐, [삼국지강의(品三国)-2], <48강. 방법은 달라도 결과는 같다>, 2007.
이중톈의 [삼국지강의-2]는 <48강>으로 끝난다. 여기서 저자는 [주역]에서 인용한 '수도동귀(殊塗同歸)'를 마지막 강의 제목으로 한다. 즉, 길은 다르지만 결과는 같다는 의미로 조위-촉한-동오의 '삼국'이 모두 '사족지주계급'과 투쟁한 '서족평민계급'이었고 그 투쟁 방식은 달랐지만, 다시금 천하통일 후 제국의 '사족지주계급' 정권의 흐름에 역행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이들의 '조건과 정세'가 '사족지배계급' 또는 '사족지주계급' 승리의 '필연'적 '경향성'을 입증한다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이들 삼국지 영웅들의 실패는 '서족' 같은 평민계급을 결코 대표할 수 없는 군주제나 제국제의 '필연'적 한계의 역사적 '경향성'을 증명한다.
유비와 제갈량은 이 중 더욱 심한 모순을 보이는데, 한나라 황실을 재건하겠다는 이들의 정치적 이상으로서의 '촉한정통론'은 '서족' 평민계급의 '혁명성'을 담보하기에는 너무도 보수적이었다.
조조의 조위 정권 또한 상대적으로 가장 개혁적이었으나 조비의 황제 등극 후 '구품중정제'의 도입으로 '사족지주계급'의 기득권과 타협하면서 '사족'의 권력을 강화시키는 반동을 낳고 말았다. 조위가 '사족' 사마의에 의해 멸망당한 것은 필연이었다.
손권의 동오는 조위나 촉한과는 달리 천하통일의 정치적 이상은 없이 강동 지역할거 정권에 불과했다. 그들이 마지못해 천하통일 전쟁에 돌입했을 때는 이미 사마씨의 천하통일 정권이 공고해진 후였다.
[삼국지] '수도동귀(殊塗同歸)'의 '경향성'은,
'조건과 정세'에 기반한 역사유물론의 정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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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국지강의(品三国)-2](2007), 이중텐, 홍순도 옮김, <김영사>, 2007.
2. [삼국지강의(品三国)-1](2006), 이중텐, 김성배/양휘웅 옮김, <김영사>, 2007.
3. [위진풍도 - 이중톈 중국사 11](2015), 이중톈, 김택규 옮김, <글항아리>, 2018.
4. [삼국지(三國志], 나관중, 황석영 옮김, <창작과비평사>, 2003.
5. [삼국지 인재전쟁](2019), 와타나베 요시히로, 노만수 옮김, <더봄>,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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