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 국토가 박물관이다"
"전 국토가 박물관이다"
- [국토박물관 순례 1], 유홍준, 2023.
1.
내가 KBS 1TV 대하역사드라마를 좋아했던 이유는 그 많던 역사극 중 철저한 역사 고증을 했다고 믿어서였다.
2000년대 초반 '태조 왕건', '대조영'이나 '정도전' 등을 보면 극 중간에 역사문헌을 인용하거나 지도를 보여주며 시청자들에게 '정사'에 기반한 역사적 사실들을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대목이 가장 좋았다.
다른 상업방송국에서 방영하던 퓨전역사극보다 무대도 세트도 후졌지만 나는 오래된 역사고전을 읽는 듯 한 기분에 오히려 그런 배경에 더 이끌렸다.
오래 기다렸던 KBS의 새 대하역사드라마 '고려거란전쟁'을 처음 한 편 보고 다시 안 보게 된 건, 내가 좋아했던 문헌 인용과 구식 세트가 없어서였다.
내용에는 흥미가 가는데 막상 찾아 보지 않게 되는 걸 보면,
역시 내 취향은 후지고 구식이다.
취향은 구석기 시대인 거다.
2.
"환인과 집안의 고구려 유적과 연길의 발해 유적에 대한 한국인의 관광을 철저하게 통제하여 출입을 막는 것은 물론이고 사진조차 찍지 못하게 하는 것을 보면 동북공정의 진짜 목적이 무엇이었는가를 의심하게 되는 것이다. 이럴수록 우리는 고구려와 발해가 잃어버린 역사가 되지 않게 우리의 공정을 진행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내가 '국토박물관 순례' 고구려편의 답사처를 만주 땅 환인과 집안으로 잡은 것은 우리 역사와 문화유산에 대한 내 나름의 공정이다."
- [국토박물관 순례 1], <고구려 3>, 유홍준, 2023.
한편으로 30대가 된 21세기 벽두의 내가 사찰을 좋아했던 이유는, 불교를 믿어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시리즈 때문이었다.
내가 스무살이었던 1993년에 처음 나온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는 동학농민전쟁의 고장부터 시작하여 우리 국보와 보물들의 대부분을 소장하고 있는 천년 고찰들을 멋지게 소개해주고 있었음에도, 이십대의 나의 관심을 별로 끌지는 않았더랬다.
"나이 서른에 우린 어디에 있을까~"라고 이십대에 노래 부르다가 막상 나이 서른이 되니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가 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나는 21세기 들어 20세기 말의 답사책을 역주행하며 틈날 때마다 국내의 온갖 절들을 찾아다녔다. 오래된 사찰의 구석구석을 돌아보고 모든 문자와 유물을 눈과 마음으로 읽으며 숲과 절의 냄새에 코를 킁킁거리는 나를 아내와 어린 아들딸은 멀리하기 시작했다. 어쩌다 처자식과 콧바람 쐬며 놀러 갈 때는 혹시라도 절에 가자고 할까봐 내가 입만 열면 가족들은 "안 가~"라고 일단 대답 먼저 하고 나서 대화는 시작되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오래된 사찰의 향을 맡듯 유홍준 선생님이 알려준 대로 천년고찰들을 돌아다녔고, 선생의 <논제명찰(論題名刹)>을 금과옥조처럼 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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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 뿐만 아니라 우리 국토와 역사를 깊이 있게 돌아보게 하는 유홍준 교수의 글쓰기는 작문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필사'를 하고싶을 정도로 깊은 감명을 주기도 했다.
선생 또한 자신의 글쓰기를 이끌어준 선학들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자신의 글 곳곳에서 잊지 않고 밝힌다.
그런 유홍준 선생께서 2023년 초겨울에 [국토박물관 순례] 시리즈로 다시 돌아왔다.
시리즈는 우리 역사의 시대별 연대기 순으로 구석기와 신석기의 선사시대부터 청동기와 철기로 넘어오며 고구려-백제-신라 및 가야의 삼국시대 등의 분야별로 대표적인 지역을 '박물관'처럼 '순례'한다.
그렇다고 꼭 해당 시기의 이야기만 들려주는 것이 아니라 해당 지역의 역사와 현재의 모습에 관한 전반적인 답사기를 덧붙인다.
역사 이야기 뿐만 아니라 '답사기'의 형식은 그대로 유지하되 우리의 전 국토를 '박물관' 삼아 경외하는 마음으로 '순례'를 다시금 시작하는 노학자의 모습이 아련하다.
구석기 시대는 해당 시기의 첨단기술이었던 '아슐리안 주먹도끼'가 발견되면서 동양 또한 유럽(서양)과 다르지 않은 구석기 역사로서 세계 역사학계에 인식되도록 만든 구석기 유적지의 세계적 대표지역 경기도 연천 전곡리 이야기로 시작한다.
신석기 시대는 서울 암사동 같은 대표 유적지를 제치고 부산 영도의 조개더미(패총) 이야기를 하지만 오래전 '절영도'부터 시작하여 부산육지와 연결되면서 '영도'가 된 근현대 이야기도 곁들인다.
청동기와 철기 시대는 울산 언양을 거치며 신석기 시대 반구대 암각화와 추상적 문양으로 선조들의 미학적 감각의 발전을 증명하는 천전리각석 및 국내에서 두번째로 큰 언양 고인돌 등을 돌아 '선사시대'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역시 "알고 보면 보인다"는 사실을 답사와 글쓰기로 보여준 유홍준 교수의 진면목은 '역사시대'로 접어들며 더욱 빛나기 시작한다.
고구려 시대를 이야기하며 평양이 아닌 만주의 환인과 집안을 소개한 이유는 짐작하다시피 중국의 '동북공정'에 맞선 우리식의 역사 찾기라는 유홍준 선생 나름의 역사공정이다.
704년 고구려 역사에서 첫 수도 환인(같은책, <고구려 2>)은 고구려 시조인 추모왕 고주몽부터 유리왕까지 40년 역사, 두번째 수도 집안(같은책, <고구려 3>)은 420년의 역사를 지닌다. 터가 좁고 중국 한사군과의 접경에 위치했던 첫 수도 환인으로부터 집안의 국내성으로 천도한 고구려는 유리왕부터 고대국가의 틀을 마련한 미천왕과 소수림왕, 광개토대왕과 장수왕까지 고구려 역사의 60%를 차지한 전성기였다.
<고구려 1>편은 만주 압록강변을 따라 오골성 및 박작성 등의 고구려 옛성으로 비정된 지역을 돌아, <고구려 2>편의 고구려 첫 수도 환인의 오녀산성, <고구려 3>편에서는 고구려 전성기의 수도 집안 국내성에서 광개토대왕릉으로 추정된다는 태왕릉과 광개토대왕릉비, 장수왕릉으로 알려진 장군총 등을 고구려의 하이라이트 답사지로 소개하고 있다.
https://brunch.co.kr/@beatrice1007/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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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현재가 아닌 2000년대 초반의 답사기록를 현재에 맞도록 재구성한 답사기일 수 밖에 없는 것이, 중국의 '동북공정'이 강화되면서 현재는 중국이 고구려 유적과 유물을 독점하고 한국인의 접근을 막고 있는 엄연한 현실 때문이다.
오래전 답사기에 의존하고는 있지만 역사문헌을 통해 고구려 역사와 유물 및 유적을 소개하고 설명하는 유홍준 교수의 글쓰기는 그럼에도 여전히 내게는 빛난다.
그의 미려한 글쓰기가 여전히 빛나는 한,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의 1권 <서문>의 첫 문장이었다는 다음과 같은 이 말은 진리가 된다.
"전 국토가 박물관이다."
- [국토박물관 순례 1], <책을 펴내며>, 유홍준, 2023.
3.
나의 취향이 후지고 구식이어도 별 수 없다.
화려한 액션과 영화 같은 신(scene)이 난무한들,
내게는 문헌과 유적유물을 직접 인용하고 소개하는 역사고증이 없는 대하역사드라마는 별로 매력이 없다.
새로 시작한 대하드라마보다 유홍준 교수의 다음 이야기 [국토박물관 순례] 2권에 더 이끌려 펼쳐드는 이유다.
그렇게 나는 유홍준 교수님의 글쓰기 펜의 행적을 따라서 만주의 고구려를 떠나 백제의 두번째 수도 부여로 간다.
***
1. [국토박물관 순례 1 - 선사시대에서 고구려까지], 유홍준, <창비>, 2023.
2. [국토박물관 순례 2 - 백제, 신라, 그리고 비화가야], 유홍준, <창비>, 2023.
3.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3], 유홍준, <창비>, 1993.~1997.
4. [새로 쓰는 광개토왕과 장수왕], 이석연/정재수, <논형>, 2022.
5. [고구려 고고학], 중앙문화재연구원, <진인진>,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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