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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용원 Dec 30. 2023

[파격의 고전](2016) - 이진경

- "不知所終" : 어떻게 되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不知所終" : 어떻게 되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 [파격의 고전], 이진경, <글항아리>, 2016.





"수많은 소설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모른다(不知所處)'나 '어떻게 되었는지 아무도 모른다(不知所終)'는 말은 이 '은거'라는 선택을 표현한 것인데, 대부분의 해석자는 이 말을 현실을 등지는 소극적인 도피나 심지어는 현실에서 패배한 자들의 소외로 이해하는 듯 합니다... (그러나) '은거'란 세계로부터 도피하는 게 아니라... '다른 세계'('외부')를 찾아가는 것, '다른 세계'를 구성하는 것입니다... '외부'란 누구에겐 가까이 있어도 더없이 멀고, 누구에겐 멀리 있는 듯 보여도 더없이 가까이 있는 것, 어디에나 있는 것입니다."

- [파격의 고전], <11장. '금오신화'와 '최고운전' : 이계와의 만남, 혹은 외부를 본 자의 고독>, 이진경, 2016.



1.


내가 소설을 쓰고 싶었던 이십대에,

당시 나의 주제는 '부재(不在)'였다.


고등학교 때 읽었던 '허생전'의 마지막처럼 한바탕 놀다가 사라지고 남은 자리, 그 '부재'의 현장을 멍하니 쳐다보는 어영대장 이완처럼.


불평등한 세계를 뒤집어 엎겠다며 한바탕 소란을 피우다가 '90년대라는 세기말에 들어서자 갑자기 '변신술'을 부리며 '부재'하던 자들이 '허생'이었다면, 그들을 쫓다가 어느 순간 그 '부재' 앞에서 멍때리고 있는 나는 '이완'이었다.


여기서도 나는,

언제나 그래왔듯,

주인공이 아닌 구경꾼이었다.


https://brunch.co.kr/@beatrice1007/324



2.


"특히 현실에 '부재'하지만 강력한 능력을 갖는 기이한 동물은 인간 자신에게 없는 어떤 것에 대한 '욕망의 표현'이며, 그런 동물의 형상으로 자연에 투영된 인간적 '소망의 표현'입니다... 홍길동의 도술과 박씨 부인의 도술 모두 국가나 임금에 대한 도덕적 충실성, 가정에 대한 도덕적 충실성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이와 달리 유희적인 방식으로 쓰였던 전우치의 도술이 오히려 통치에 반(反)하는 '반(反)국가적' 도술이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인간적 성격의 도술과 동물적 성격의 도술이라는 차이가 이와 무관하지 않음도 다시 한 번 말해두고 싶습니다."

- [파격의 고전], <5장. 전우치 대 홍길동 : 변신술과 도술의 상이한 유형들>, 이진경, 2016.



'80년대 '사구체 논쟁', 즉 남한체제의 '사회구성체'에 대한 논쟁을 정리하고 유행시킨 철학자 이진경 선생은 운동권의 전통과 같은 'NL'식 '식민지반봉건' 체제론에 대항한 'PD'식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 체제론의 선봉이었다. 그러다가 한때의 남한체제 변혁론이 사그라진 '90년대 초반에 '사구체 논쟁'은 갑자기 사라지고 혁명의 '부재'로 남았다.


https://brunch.co.kr/@beatrice1007/11


이진경 선생은 '90년대 중후반에 철학의 '탈주'를 통해 '외부'를 돌다가, 21세기에 들어서자 칼 마르크스의 '고전' [자본론]을 다시 들고 자본주의 '너머'인 '외부'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자본을 넘어선 자본](2004)이다.


https://brunch.co.kr/@beatrice1007/10


한때 '부재'한 듯 했던 철학자 이진경의 주제는 '외부'다.


그런 그가 2016년에는 우리의 고전소설들을 대상으로 두고 텍스트의 '내재적' 의미를 중심으로 한 구조주의적 독해를 했는데, 이 작업을 정리한 책이 [파격의 고전](<글항아리>, 2016)이다.



책의 서문에서 그는 "'파격(破格)'이란... 평가의 척도를 깨는 것이며, 사물을 보고 '바로잡는' 틀을 깨는 것이다. 사물과 '겨루는' 대신 '틀(格)'과 겨루는 것이다"(같은책, <머리말>)라고 정의하면서 시작한다. 즉, 일반적인 통념을 깨는 우리의 '고전' 읽기다.


이 책의 부제는 '심청은 보았으나 길동은 끝내 보지 못한 것'이다.

통념적으로 조선의 '반역자' 허균이 쓴 최초의 한글소설로 알려진 '홍길동전'은 적서자 차별에 대항한 '사회소설'로 알려져 있다. 이진경 또한 여태 그렇게 생각했지만 '파격'의 눈으로 다시 독해하니 그렇지 않더라는 것이다.


홍길동이나 전우치나 도술을 익히고 국가권력에 대항한 '반(反)국가적' 변신술을 부리지만 이 둘의 변신술은 다르다.

'호부호형',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얼자의 한을 반복적으로 소환하며 국가를 상대로 '주역' 등을 통해 익힌 도술과 변신술을 부리는 홍길동은 자신의 꿈이었던 병조판서에 제수되자 마자 도망쳐 남경 제도와 율도국 건설의 '외부'로 이탈하지만, 결국 서얼자 차별의 신분제의 체제 '내부'를 벗어나지 못하고 율도국의 원주민 학살을 통해 '왕'이 되고 마는 체제 '내부' 종속자에 불과하다.

반면, 구미호 같은 암컷 여우와 동침하고 도술을 배운 전우치는 끊임없이 체제 '외부'로 탈주하고 이탈한다. 국가권력에 대한 전우치의 도술과 변신술은 다분히 '동물'적이고 체제 '내부'에는 없는 다분히 유희적인 어떤 것이다. 홍길동처럼 체제로부터 인정받기 위한 '호부호형'의 몸부림과는 다르다. 전우치의 변신술은 목적이 없다. 억압적 권력에 대항한 한없는 조롱이다. 이에 대항하여 당시 조선 후기의 선비들은 서화담에 의해 사로잡히는 전우치를 그린 한문판 '반(反)전우치전'을 지어서 퍼뜨리기도 했단다.


홍길동의 도술과 변신술은 '인간적'이기에 체제 '내부'에 철저히 종속되고,

전우치의 그것은 '동물적'인만큼 언제까지나 체제 '외부'로 탈주하고 있다.





"... '심청전'은 통상적으로 이해되듯이 목숨을 건 '효(孝)'를 설파하는 텍스트가 아니라 오히려 그와 반대되는 텍스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효라는 도덕적 명령에 대한 지나친 복종을 통해 그 명령 자체를 당혹 속으로 모는 역설적 비판의 텍스트이고, 효로 되돌아가지 않는 비인칭적 죽음을 통해 거기서 열리는 다른 잠재성의 세계로 나아가는 텍스트요, 그럼으로써 아버지나 맹인들, 눈먼 도덕적 명령을 '집'에서 벗어나 '밖'('외부')으로, 다른 넓은 세계로 끌어내는 텍스트입니다. 그런 점에서 '심청전'은 '효'라는 잘 알려진 '답'을 엽기적 사례로써 설파하고 강권하는 텍스트가 아니라, 효이기를 중단한 효, 집 밖으로 끌려 나간 효를 통해 효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는 텍스트, 효에 대한 다른 관념을 제안하는 텍스트라고 해야 할 겁니다."

- [파격의 고전], <1장. 심청, 마조히스트? : 윤리적 소설과 '반인륜적' 독서>, 이진경, 2016.



율도국이라는 체제 '외부'를 향했음에도 실질적으로는 '내부'를 벗어나지 못한 '홍길동전'은 역시, 체제 '내부'로 들어오는 것을 끝까지 거부하는 '심청전'과도 대비된다.


보통 우리는 '심청전'이 '효(孝)'를 강조하는 소설 또는 판소리로 알고 있다. 그러나 텍스트를 '파격'적으로 독해하면, 정반대의 '반윤리적' 이야기가 된다.

심청의 아버지 심봉사와 심청은 마을 공동체의 '부조'를 통해 살아간다. 여기서 '동냥'이 아니라 공동체의 적극적 시주였다는 것이 중요하다. 저자에 의하면 '공동체(community 또는 commune)'는 '선물(munus)'을 '공유(com-)'하는 단위의 어원을 갖는다고 한다(같은책, <6장>). '공동체'는 '선물 의해 결합된 관계'(같은책, 같은곳)라는 것이다.

조선 말 우리의 동학혁명 소단위로서 상부상조하는 바로 그 마을 공동체다. 마르크스가 만년에 주목한 러시아의 '미르공동체'나 게르만의 '마르크공동체' 같은 유럽의 시골공동체와 같은 '생태적' 공동체인 것인데, 근대적 자본과 화폐적 교환관계 이전에 모두가 '함께 살자'는 가치가 더욱 중요하게 여겨지던 그런 삶이었다. 그런 한편으로 조선왕조의 권력은 부모에게 허벅지살 고기나 손가락뼈 사골국을 바치는 극단적 '삼강행실'의 유교적 윤리를 강조하면서 이 민중적 공동체의 자율성을 통제하고 억압한다.


https://brunch.co.kr/@beatrice1007/214

https://brunch.co.kr/@beatrice1007/237


여기서 굳이 임당수에 몸을 던지지 않아도 공양미 3백석을 얻을 수 있었음에도 보란듯이 선원들과의 '교환' 또는 '계약' 관계를 들먹이며 결국 목숨을 내던지는 심청의 행적은 '효도'가 아니었다는 거다. 오히려 반대로 극단적 '삼강행실' 윤리에 대한 강력한 저항이다. 부모가 '나가 죽어'라 한다고 '네. 알겠습니다'며 진짜로 즉시 나가 죽는 게 효도일 수 없는 것처럼. 심봉사의 초반 실수로 공양미 3백석에 몸을 판다고 진심 팔려가는 것이 결코 효도일 수는 없다. 강단있는 심청의 저항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용왕이라는 '다른 세계'('외부')를  만나 부활한 심청은 가정이라는 체제로 다시는 복귀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 높은 귀한 신분이 되어 아버지 심봉사를 찾는 게 아니라 전국 봉사모임을 개최하여 그들을 밖으로 나오게 한다.

심청은 끝까지 자기를 죽음으로 내몬 가정의 체제 '내부'로 들어가지 않는다.

심청은 체제 '외부'의 힘으로 '내부'를 끌어낸다.


[파격의 고전]의 부제가 말하는 '심청은 보았으나 길동은 끝내 보지 못한 것'은 바로,

체제 '너머', 즉 체제의 '외부'인 것이다.





"홍길동이 자신에게 없는 '귀함'을 찾아 아버지와 임금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었고 그들이 줄 수 있는 인정의 기호를 얻고자 자신을 버린 체제의 '내부'로 들어가고자 했던 것과 달리, '허생전'에서 허생은 '내부'로 들어가려 하지 않습니다. 그는 언제나 '외부'를 향해 나아가며, '외부'적인 것의 작동을 실험하고, '외부'적인 것의 세계를 만들고자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의 언행은 앞서 말한 '이탈의 정치학'이라는 개념에 부합합니다."

- [파격의 고전], <12장. 홍길동의 분신들과 허생의 '잉여'들 : 상징적 전쟁과 탈주의 정치학>, 이진경, 2016.



이제 다시, [파격의 고전]에서 제일의 비판적 텍스트, '홍길동전'은 '허생전'과도 비교된다.


일반적으로 연암 박지원의 한문소설 '허생전'은 근대적 자본 증식 또는 화폐 교환 체제에 대한 실학적이고 긍정적 소설로 알려져 있다. 고등학교 문학 시간에도 그렇게 배운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파격'의 관점에서 독해하는 '허생전' 텍스트는 근대로의 전환에 대한 비판적 이야기로 읽힐 수 있다.


과거시험도 보지 않고 주구장창 글이나 '충분히' 읽으려는 몰락양반 선비 허생에게 아내는 '도둑질이라도 해서 돈이나 벌어오라'는 지극히 생계적이고 현실적인 요구를 하는데, 알고보니 근대적 경제관념의 천재 허생은 조선 경제에 폐해가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매점매석을 통해 수백배의 이익을 얻고 군산의 도적단을 찾아가 도적질의 근원인 생계문제를 해결해 주면서 작은 섬을 얻고는 체제 '외부'의 대안공동체를 건설하고자 한다.


여기서 홍길동과의 차이점은 허생이 '외부' 체제의 권력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지점이다. 허생은 그 작은 섬에서 통용되지도 못할 50만냥을 바다에 버리고 '글줄 아는 선비들'을 데리고 나온다. '잉여'는 계급 차별을 낳는다는 점을 간파했고 '문자'는 권력의 생성과 강화에 복무하는 주요기제라는 사실을 알았던 것이다.

체제 '외부'에서 '내부'로 돌아와 애초 1만냥을 빌린 변씨에게 매점매석과 나카사키 구휼의 '해외투자' 등으로 불려서 남은 돈을 전부 되갚는 과정에서, 원리금만 받겠다는 변씨에게 했던 그 유명한 일갈은 매우 인상적이다. "내가 장사치인 줄 아는가?"라는 바로 그 말이다.


허생의 비범함에 놀란 부자 변씨가 연결해준 어영대장 이완에게 관직을 추천받았지만, 허생은 당시 조선 관료사회에서 관철될 수 없는 요구사항을 제안하면서 예상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자 골방의 뒷문으로 '탈주'한다.


'허생전'의 결말인 '부지소종(不知所終)'이 그의 '부재'를 표현한 방식이다. 즉, 허생이 '부재'를 남기고 사라진 후 그가 '어떻게 되었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이야기다.


사라진 허생이 간 곳은 아마도 체제 '너머'인 체제의 '외부' 어딘가로 추정되는데, 그곳이 어디인지 '아무도 모른다'. 그런 만큼 우리가 체제를 넘어서 멈추지 않고 찾아야 할 미지의 대안세계이자 '외부'일 것이라는 변함없는 결론만이 대대로 이어진다.



3.


젊었던 내게 '부재(不在)'는 무책임한 체제 '내부'의 변신술로만 보였을지 모른다.

그랬기에 지금껏 나는 어영대장 이완처럼 멍때리고 있었던 거였을 지도.


이제 이진경 선생을 따라 '파격'의 관점에서 본 우리의 고전은 '부재'로 남은 그 선배들이 '부지소종(不知所終)'을 통해 체제 '외부'로 사라져 버렸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으로 중년이 된 나의 사고를 확장케 한다.


아니,

모르겠다.

어느새 기성세대가 된 내가,

더 이상 멍때리는 어영대장 이완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부재'를 남기는 허생이 되고 말았을는지도.


***


1. [파격의 고전 : 심청은 보았으나 길동은 끝내 보지 못한 것], 이진경, <글항아리>, 2016.

2.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방법론](1987), 이진경, <그린비>, 2008.

3. [자본을 넘어선 자본], 이진경, <그린비>,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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