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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ssie Jul 21. 2024

누가 죽었어?

내 이름 석 자

역시 1905년 동네에 살 때이다.

한국에서 엄마로부터 전화가 왔다.


나의 안부를 물으시며

이상한 꿈을 꾸었다고 하셨다.


- 무슨 꿈인데?


엄마야 나보다 꿈을 어마어마어마하게

많~이 꾸니까 꿈은 그야말로 일상이다.


- 사람들이,
 어떤 여자애가 죽었다고 하는 거야.
 그래서 누가 죽은 건지 물어봤더니..

- 물어봤더니?

- 이름이, 연아? 죽은 사람 이름이
 이연아라는 거야.


이연아는 내 옛 이름이었다.


엄마의 꿈 이야기를 듣자마자 마치 '쿵!'

하는 것 같았다. 자연스럽게 넘겼지만

속으로는 어딘가 찔리는 느낌이었다.


그렇다. 당시 나는 죽음을 생각하였다.

그 시기 나로 하여금 그런 악한 생각을

하게 된 대표적 통로라면 그 예로


1. 룸메이트의 연습소리

2. 차이콥스키 교향곡 [비창]

3. 본능적 죄


정도였지 싶은데 고작 저것이라는 말인가

할 이도 있겠지만 각자 겪는 고통, 기쁨의

무게와 크기는 상상 이상으로 제각각이다.


나는 노력없이 저절로 음을 구분할 줄 아는

소위 절대음감이다. 100번 중 90번만 음을

맞춘다면 그는 절대음감이라 하기 어렵다.

이름에 이유가 있다. '절대' - perfect.

러시아어로도 그 뜻을 지닌 형용사가 붙는다.


이는 나의 장점이자 큰 약점이다.
일단 내 주변엔 절대음감이 아주 많고, 그게
자랑이 될 순 없다고 생각한다. 노력한 것이
아니니까. 그리고 각자 재능은 다를 뿐이다.


나의 경우 예를 들어 442kHz와 440, 그리고

소위 바로크 주파수도 충분히 구분 되는데다,

멀리에서 차가 경적을 울려도 그것이 당연히

음정으로 들린다. ''이 막 인식되는 거다.


본능적으로 일상 소리는 음정에서 배제하려

노력하지만, 맞춘다기보다 그냥 아는 것이고

쉴 때에도 음악은 웬만해서 잘 듣지 않는다.

내가 쉰다는 것은, 아무 소리도 듣지 않는 것.


연주 직전, 관객의 벨소리에 고요가 깨지자,
정명훈씨가 그 음정을 그대로 피아노로 쳐서
다들 웃던 짤을 본 적 있다. 자연스러운 거다.
절대음감들에게는 말이다. 음악엔 유리하다.


초딩시절에, 청력 검사자가 당황했다 들었다.

한때 이명으로 삼성서울병원 이비인후과에서

뇌 MRI까지 찍으며 온갖 검사를 했는데, 후에

의사가, "솔직히 그 정도 데시벨의 이명으로

여기까지 찾아와서 조금 놀랐지만, 이해한다"

고 말했다. 일반인이라면 넘길 수준이었던 것.

지금도 나는 교회에 귀마개 없이 있을 수 없다.

(이에 대한 내용은 나중에 한 번 다루고 싶다)


뭐가 이리 복잡하냐고? 그래서 하는 말이다.

음악 안에서만큼은 큰 장점이지만, 일상에서는

단점일 확률이 높다. 아무튼 이 음감에 대하여

논하자면 이 정도로는 모자랄테니 넘어가겠다.

(귀는 어두워 매일 잘 자는 '복'까지 받았음)



다시 본론.


당시 내 룸메는 절대음감이 아니었으며 현악

전공자였다. 박식하고 똑똑한 사람이었지만

매일 '연습 소리를 들어내는 것'은 한계였다.

차마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으나 속으로는

'이 소리를 계속 듣느니 차라리 ㅈ고 싶다'고

진심으로 생각되는 시간이 많아지고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학교에서 배우는 음악이

마침 차이콥스키의 교향곡 6번 '비창' 이었다.

제목답게 곡이 그래서인지 음악과 소리에 큰

영향을 받던 나는 몹시 부정적 영향을 받았다.

그 음악을 매일같이 들으니 더욱 ㅈ고 싶었다.


생명은 오직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다는 것을

인정하기에 그에 반기를 들지 않을 것임에도,

자꾸만 'ㅈ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오던 시기.


그 때 엄마의 전화로, 내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전해듣게 된 것이다. 기분이 어땠냐고? 묘했지.


가장 먼저 든 인식은

만일, 아주 만일 내가 나쁘게 갈 경우,

우리 엄마는 어떻게 되겠는가에 대한 것.


오랜 유학기간 동안, 어디에 까발려도(?) 결코

부끄러울 행동을 한 적 없던 이유가 첫째는 물론

하나님을 믿기 때문이었지만 둘째는 늘 엄마였다.


마치 몰래, 나쁜 생각 하다 들킨 사람처럼

속으로 화들짝 놀란 채 정신을 차리게 됐다.


재미있는 사실은 꿈에서 나온 그 이름은 당시에

이미 사용하지 않던 '옛 이름'이었다는 점이다.


마귀는 '내 현재의 이름'을 가지고는 뭘 못 한다.

이 사실 자체도, 이것을 내가 아는 것도 흥미롭다.


내 영이 혼탁할 때에, 어머니를 통하여 '깨우는'

역할을 해주셨다. 나는 살아있고, 물론 앞으로도

신이 허락한 날까지 지내다 갈 것임을 확언한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자신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것은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존하는 생명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John 3:16
죄의 삯은 사망이나 하나님의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를 통해 얻는
영원한 생명이니라. Romans 6:23
육신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사망이요
영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Romans 8:6
내가 지금까지 본 것에 주목할지어다.
사람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시는
그의 생명의 모든 날 동안 먹고 마시며
해 아래에서 행하는 자기의 모든 수고의
좋은 열매를 즐기는 것이 선하고 마땅하니
이는 그것이 그의 몫이기 때문이라.
Ecclesiastes 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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