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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예은 Mar 22. 2024

봄날, 해변의 노을과 마라로제떡볶이

추천곡: 규현 <애태우나요>

매년 봄가을은 우리를 애태웁니다. 하늘과 나무의 색은 성실히 변하지만, 피부에 닿는 온도는 덥지도 춥지도 않은 적정선에 머무르기를 거부하지요. 지난 주말에는 한낮의 기온이 20도를 웃돌며 반팔을 입은 사람도 볼 수 있었는데, 월요일부터는 다시 직장인의 마음처럼 흐린 하늘에 서늘한 바람이 불었습니다. 춘분의 날도 지났건만, 아직 봄 옷을 선뜻 집어들 용기는 나지 않습니다. 그러고 보니, 토요일인 내일도 비 소식이 있네요.


많은 이들이 기다리는 도쿄 메구로강의 벚꽃도 여전히 여행객과 현지인 모두를 애달프게 하는 중입니다. 꽃 봉오리는 한껏 부풀어 올랐는데, 찬란하게 터지기에는 아직 온기가 부족한가 봐요. 조만간 한국에서 놀러 오는 언니와 나카메구로로 꽃놀이를 가기로 했으니, 다음 주 편지에서는 벚꽃 사진을 보여드릴 수 있기를 바라요.


도쿄에서 올해 첫 완연한 봄을 느꼈던 지난 토요일, 저는 온종일 가마쿠라에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노래 부르는 친구와 사진 찍는 친구와 함께요. 모델을 해 달라고 해서, 늙고 부족하지만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인데, 제가 해야 할 고맙다는 말을 오히려 많이도 들었어요. 둘 다 지난 몇 달간, 저에게 편안함과 웃음을 선물해 준 좋은 친구들인데, 앞으로 그에 합당한 보답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노력해야겠지요.


에노덴을 타기 위해 후지사와역에 모인 시간은 10시. 촬영 소품이 되어 줄 꽃다발을 사들고 가마쿠라코코마에역에서 내렸을 거예요. 슬램덩크 오프닝에서 강백호가 서 있는 철로 앞은 여전히 인파로 붐비고, 맑은 봄햇살 아래 은박지처럼 반짝이던 바다는 청춘을 떠오르게 했습니다. 테스트 촬영을 몇 번 하던 감독님은, 태양이 너무 강렬해서 사진이 마음에 안 드는 눈치였고, 저는 어디가 마음에 안 드는지 알 수 없었고요.


봄볕이 식기를 기다릴 겸, 바다가 보이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근사한 점심을 먹었습니다. 물론 와인도 한 잔 마셨고요. 저만요. 지난 7,8년 동안 일본에 살며 가마쿠라를 적어도 스무 번은 넘게 왔을 텐데, 올 때마다 좋은 곳이 많아 놀라곤 합니다. 식사 후에 찾은 카페도 그랬어요. 가마쿠라역 주변을 걷다 우연히 발견했는데, 레스토랑 뒤편에 연못이 달린 정원에서 커피를 마실 수 있더라고요. 저는 로제 와인을 한 잔 더 했습니다.


정원에서도 몇 장의 사진을 찍고, 망중한을 즐기다 보니, 적당한 자연조명이 만들어져 서둘러 해변으로 돌아갔습니다. 해는, 한번 지기를 결심하면 머뭇거리지도 뒤돌아보지도 않지요. 시치리가하마역에서 도착했을 때 해는 자취를 감춘 뒤였지만 그가 흩뿌린 노을빛이 훌륭한 배경이 되어 주었습니다. 무엇보다, 해변에서 맨발로 느끼는 보드라운 모래와 시원한 바닷물의 감촉이 잊히지 않네요. 부디, 감독님이 보시기에 결과물이 만족스러웠기를 바라요. 저는 흡족, 아니 황송합니다.



이날을 기념할 만한 음식이 뭐가 있을까 생각하다 불긋한 노을빛을 닮은 마라로제떡볶이를 떠올렸습니다. 도쿄의 엽기떡볶이는 국내만큼 빠르게 업데이트되지 않아, 지난 9월 서울을 방문했을 때 마라떡볶이를, 그리고 불과 한 달 전이었던 2월에 마라로제떡볶이를 맛보았어요. 비록 필수 토핑인 콘마요는, 장을 볼 때 깜빡하는 바람에 없지만, 지난주에 못 먹은 차돌박이는 듬뿍 넣었어요. 오늘만 두 번이나 먹었는데도 남은 걸 보면, 결코 1인분은 아니니 주의해 주세요.


재료: 분모자 150g, 넙적 당면 150, 말린 유부 100g, 차돌박이 200, 양배추 1/4, 양파 1/2, 파 1/2, 달걀 1
양념: 다진 마늘 2T, 우유 500ml, 생크림 250ml, 고추장 1T, 고춧가루 2T, 굴소스 1T, 백종원 마라소스 1.5T, 소금 1t, 후추 1t

1. 넙적 당면과 냉동 상태의 분모자를 미지근한 물에 30분 이상 불린다.
2. 달걀을 취향에 따라 삶는다.
3. 프라이팬에 식용유를 두르고 다진 마늘과 야채, 유부, 고기를 순서대로 넣는다. 소금과 후추로 밑간을 한다.
4. 고기 색이 갈색으로 변하면 나머지 양념과 분모자를 넣고 끓인다.
5. 넙적 당면은 따로 끓는 물에 넣고, 색이 투명해진 뒤에 4에 넣는다.
6. 그릇에 옮겨 담고, 삶은 달걀을 올린다.


곁들인 음식은 우니 맛이 나는 두부인데요, 성게소가 먹고 싶지만 상황이 녹록지 않을 때 즐겨 찾는 제품입니다. 술안주로도 좋으니, 일본 여행을 오실 때 편의점이나 슈퍼에서 발견하신다면 한번 드셔 보세요.



오늘은 봄 노을에 어울리는 곡도 잘 찾은 것 같아요. 솔로지옥 2 OST였던 가수 규현 님의 <애태우나요>.


왜 날
애태우나요 사랑해 줄 것도 아니면서
애태우나요 잠시 머물다 또 사라질 텐데
이미 알고 있는데 애태우나요


봄소식에 애가 타는 것은 봄이 우리를 사랑하는 마음보다 우리가 봄을 더 사랑하는 마음이 더 커서겠죠.

그리고 더 사랑한다는 건, 그에 따른 행복을 누릴 자격도, 불행을 견딜 각오도 되어 있다면 뜻이 아닐까요. 더 강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에요.


좋은 소식은, 봄이 반드시 온다는 사실. 비록 찰나일지라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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