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문장들_1

백로와 세월

by 밍키

시골의 문장들_가을의 문장들


“ 백로와 세월“


백로가 애간장을 녹일듯한 귀뚜라미소리를

앞세우고는 우리 곁으로 소리도 없이 다가서자,

처서가 화들짝 놀라 가마솥 불볕더위를 주섬주섬

보따리에 싸들고는 제비들을 몰고

머나먼 강남으로 떠난다.


호시탐탐 더위가 떠나기만을 기다리던 산들바람이

안방을 차지하듯 성큼 다가서서 우리들의 옷깃을

여미게 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더위에 등 떠밀려 산으로

바다로 피서를 갔었는데,

어느새 그 일이 추억이 됐다고 생각하니,

정녕 빠른 것은 세월뿐이라는 생각이 가슴 절절이

느껴진다.


어릴 때는 어찌나 세월이 더디 가는지 하루라도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

가는 세월에 로켓 매달아 빨리 가기만을

학수고대했는데…


지금은 그와는 반대로 제발 좀 더디 가라고

가는 세월에 대롱대롱 매달려 애원도 해보지만

썩을 놈에 세월은 들은 척 만 척 구보로 간다.


찬이슬이 내린다는 백로가 돌아오면

어느 집안이고 조상님들 산소에 풀을 베는

벌초를 한다.


종교를 믿지 않는 나로서는

사후 세계가 있는지 없는지

알지도 못하고, 알 수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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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글은 늘 자연의 리듬을 따라 흐르지만,

이번 백로 산문에서는 ‘세월’이라는

더 깊고 넓은 강물이 배경처럼 깔려 있다.


자연은 말없이 제 할 일을 해내지만,

인간은 그 흐름 앞에서 늘 애잔하고 조급하며

때론 체념한다.


아버지가 묘사하신 귀뚜라미 소리,

제비의 이별, 산들바람의 등장…

이 모든 변화가 아주 조용하고 서정적인데, 그런 고요함 속에서 오히려 세월의 쏜살같은 흐름이

더 강렬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그런 묘사 속에서,

아버지의 문장을 따라가며

나 자신의 속도와 마음의 체온을

되돌아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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