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들의 호캉스, 겨울산 겨울잠

-나무들도 겨울잠을 잔다.-

by 한정선

오랜만에 집 근처 안산을 갔다.

홍제천을 따라 걷다 징검다리를 건너 물레방아를 끼고 오르면, 어느 영화의 첫장면처럼

언덕 가득 펼쳐지는 각양각색의 허브 꽃밭. 봄부터 가을까지 빨강 파랑 노랑 보라

생생한 색깔과 향기의 향연을 펼치더니 어느새 짚 담요를 덮어쓰고 동면에 들어갔다.

여름 내내 지천으로 보라 빛 꽂대를 밀어 올리던 맥문동도 세상 눈치 빠른 아이처럼,

납작 엎드린 채 추위에 새파래진 잎사귀로 뿌리를 감싸고 있다.

꽂도 나무도, 잠자는 숲 속의 공주가 되어 봄의 전령의 키스를 기다리고 있다.

겨울잠을 자고 싶을 때가 있었다.

대학 입시를 치르고 결과를 기다릴때, 건강검진 후 이상 징후로 정기적으로

정밀검사를 받아야 했을때,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던 아들의 병에 몸과 마음이

지칠때, 나는 진정 북극곰이 부러웠다.

투명 아크릴을 사이에 두고,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낯선 경험과 낯선 감각을

직면해야 하는 요즈음, 칩거와 기다림 외에는 답이 없는 답답한 일상에 나는

다시 따뜻한 동굴 속 같은 겨울잠의 유혹에 빠진다.

컴퓨터의 리셋 버튼을 누르듯, 한숨 푸~욱 자고 나면

새로운 세상이 펼쳐지리라는 꿈을 꾸면서.


겨울 산은 철지난 바다처럼, 쓸쓸하지만 따뜻하다.

알싸한 공기는 코끝을 쩡~하니 울리고, 잎사귀를 떨구어 버린 나무들의 날숨은

여과될 곳을 찾지 못하고 앙상한 가지사이를 헤집고 다니지만, 땅속의 뿌리들은

서로의 온기를 나누며, 꽁꽁 언 땅 위로 모락모락 입김을 내뿜는다.

긴 겨울잠 사이 잠시 깨어나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듯 발 밑으로 전해지는 작은 웅성거림.

무성한 침묵속에서 겨울산은 묵언수행을 하듯 다시 겨울잠을 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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