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께 쓰는 편지 #7
엄마.
리스본 안 가보셨죠?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은요… 정말 예뻐요. 진짜 아름다워요. 참나, 명색이 글 쓴답시고 똥폼 잡는 제가 그저 ‘예뻐요’, ‘아름다워요’, 이런 추상적인 형용사로 밋밋하게 표현하다니. 그런데 어떤 단어를 써야 리스본의 아름다움을 적확하게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솔직히 전 어떤 도시를 찬양하는 글을 볼 때마다 ‘도시가 다 거기서 거기지, 왜 이리 호들갑이야?’라며 시큰둥해했어요. 다 나름의 문제가 있을 텐데, 단편적으로만 보며 찬양하는 태도는 유치하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리스본은 그런 제 오만함을 단죄하듯 조용하면서도 당당하게 그 모습을 뽐냈어요. 바다 같은 테주(Tejo) 강, 그 강을 비추는 찬란한 햇빛과 (정말 빛이 달라요!) 그 빛을 반사하는 푸른 아줄레주(Azulejo) 타일, 100년 전인지 지금인지 모를 좁은 골목과 정말로 100년 전의 리듬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그리고 그 사이를 연결하는 트램… 처음 리스본에 도착했을 때를 기억해요. 마치 심연에서 아틀란티스를 발견한 잠수부가 산소통의 공기가 닳아가는지도 모르고 유영하는 것처럼, 전 구시가지의 미로 속에서 길을 잃어도 그저 좋아라 헤헤거리며 걷고 또 걸었어요. 그리고 중얼거렸죠. '내가 뭘 몰라도 제대로 몰랐구나'라고.
그런데 참 신기해요. 제아무리 매력적인 도시라도 여행자가 아닌 현지인으로 살면 그 도시에 게을러지고 거만해져요. 이 도시가 무한할 거라 착각하고 영원히 반겨줄 거라 믿으며 당연시해요. 사람이 모이는 곳은 ‘거긴 관광객이나 가는 곳이야’ 하며 안 가려고 해요. 자기도 현지인이 아니면서 괜히 관광객을 자기 구역에 불쑥 침범한 ‘이방인’ 취급하며 거만한 현지인 허세를 부려요. 저도 그랬어요. 뉴욕 시절, 자유의 여신상에는 갈 생각도 안 했고,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은 딱 한 번 갔어요. 베를린에서 살 때 모든 관광객이 가는 국회의사당은 지나가기만 했고, 이스탄불에서 살 때 그 유명한 소피아 성당은 딱 한 번 갔어요. 굳이 나서서 도시를 탐험하기보다는 당장 제 생활 반경에서 일상을 만드는 게 우선이었어요. 항상 가는 베이커리, 항상 가는 커피숍, 항상 가는 벼룩시장, 항상 가는 공원 등, 저만의 일상이 있는 저만의 뉴욕, 저만의 베를린, 저만의 이스탄불을 만드는데 급했고, 그게 제대로 ‘사는’ 거라 생각했어요. 지금 보니 참 재수 없네요. 떠날 때가 되어서야 허겁지겁 ‘가야 할 곳 리스트’를 만드는 버릇은 쉽게 고쳐지지 않았어요. 리스트는 단숨에 몇 페이지가 넘어갔고 언제나 그렇듯 시간은 절대적으로 부족했죠. 가이드북에 나오지 않은 숨은 진주를 안다는 게 현지인이 가진 무기지만, 그 무기는 엄청난 근면함을 요구하는 무기였어요.
리스본에서 살 때, 전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 않았어요. 안구에 박힌 듯 익숙해져 버린, 그래서 시큰둥해진 이 도시를 다시 느끼고 싶었어요. 16세기 대항해시대의 중심지로 최고의 영화를 누렸지만 망해버렸고, 대지진과 화재로 도시의 3분의 2가 파괴되었고, 40년간 계속된 독재에 대항하여 혁명을 일으키기도 했던 파란만장한 역사를 곱씹으면서요. 이런 역사가 쌓여 리스본 고유의 ‘애잔함’이 만들어졌어요. 어느 늦은 오후, 같이 살던 포르투갈 친구가 부엌에서 요리하며 흥얼거렸던 포르투갈의 민요 파두(Fado)를 기억해요. 비집고 들어오는 햇살을 등지고 아련한 광채를 내뿜으며 그녀는 이렇게 불렀죠.
- 당신이 탄 검은 돛배는 밝은 불빛 속에서 너울거리고 / 당신의 두 팔은 지쳐서 흐늘거리는 듯했어요 / 당신이 그 뱃전에서 나에게 손짓하더군요 / 그러나 바닷가 노인들이 말했어요 / 당신은 영영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요.
파두를 들으면 그 옛날 대항해시대 때 바다 건너 아프리카로, 인도로, 급기야 동아시아라는 먼 미지의 세계로 떠난 이들의 두려움과 먹먹함이 그대로 느껴져요. 떠난 이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자와 두고 온 가족과 고향을 그리워하는 자의 심정도요. 이 특유의 애잔한 정서를 ‘사우다드(Saudade)라고 부른데요. ‘한’ 같은 거겠죠? 이렇게 ‘사우다드’로 중무장 한 리스본이 제 마음에 들어오자 그 사우다드를 그리고 싶어졌어요. 그리고 가방 깊이 박혀 있던 마카와 색연필을 꺼냈죠. 화방이 집에서 1분 거리도 안 된다는 걸 안 순간, 육아를 핑계 삼던 제 게으름과 무심함이 너무 얄팍하다는 걸 깨달은 거예요. 여행하면서 전 계속 그리고 싶었어요. 하지도 않으면서 짐 되는 걸 왜 가지고 다니냐는 카밀의 핀잔을 무시하며 꾸역꾸역 마카와 색연필을 들고 다녔죠. 그런데 쉽지 않았어요. 여행에 치여, 생활에 치여, 도구들은 계속 배낭 깊은 곳에 박혀 있었어요. 그런 제게 리스본은 더 늦으면 안 된다고, 이렇게 매력적인 날 그리지 않으면 후회할 거라고 호통쳤어요. 맞아요. 제 기억은 그저 도망갈 궁리만 하는 천방지축 반항아와 같아서, 야반도주하기 전에 도장을 찍지 않으면 크게 후회할 게 분명했어요.
엄마. 여행을 기억하는 방식엔 여러 가지가 있어요. 여행자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여행을 추억해요.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신 후 받은 영수증 뒷장에 그때의 감정을 끄적이고, 장소를 대표하는 소품을 모으고, 하얀 스케치북에 어설프지만 진실한 선으로 풍경을 담아요. 관광객과 여행자의 차이가 여기에 있어요. 그 장소를 마음에 담고자 하는 방식과 노력의 차이. ‘나 여기 와봤다!’란 과시의 도구가 아닌, 그 장소를 향한 진심 어린 애정이요. 여행에서 돌아온 후 여행자들은 자신이 남긴 흔적을 보며 자신만의 장소를 만들어요. 자신만의 뉴욕, 자신만의 베를린, 자신만의 이스탄불… 여행자의 특권은 ‘이방인’이란 위치를 오롯이 '즐길' 수 있다는 거예요. 장소가 품은 지독한 현실의 그림자를 요리조리 피하며 그 어떤 책임도 없이 새로운 풍경과 문화가 주는 즐거움에 취할 수 있으니까요. 동화되지 않은 자기 모습을 객관화하며 짜릿함을 즐길 수 있어요. 영국 가수 스팅(Sting)은 ‘잉글리시 맨 인 뉴욕(Englishman in New York)’에서 뉴욕 한복판에 있어도 지팡이를 짚고, 커피 대신 차를 마시고 토스트는 한쪽만 구워달라고 말해요. 뉴욕의 매력을 최대한 즐기면서도 당당하게 ‘난 합법적인 이방인(I’m a legal alien)’이라고 말해요. ‘누가 뭐라고 하든 당신 자신이 되세요. (Be yourself, no matter what they say)’라고 말하는 태도는 떠날 수 있어서 가능해요. 여행자에게 있어 최고의 권력은 ‘떠남’이랍니다. 제가 흰 도화지 위에 선을 긋기 시작한 건 아마도 그 권력이 부러워서였을 거예요. 쓸데없는 현지인 심술 뒤에 있던 본모습은 질투였어요.
전 리스본을 그리는 재미에 푹 빠졌어요. 애 한 번 재우는데 진 다 빼는 애 엄마인 동시에 매너리즘에 빠진 장기 노마드였던 저를 움직이게 했으니 리스본은 정말 큰일을 한 거예요. 하루는 굴뱅키안 뮤지움에 갔어요. 정원이 멋있어서 뮤지움 자체보다 정원이 더 인기 있는 곳이죠. 정원의 노천카페에 자리를 잡고 밀크커피와 에그타르트를 시켜요. 그 달달함에 심장이 쫄깃해지면 제 앞의 풍경을 봐요. 젊은이와 연인 무리가 잔디밭에 앉아 노닥거리고 그 사이로 오리들이 꽥꽥 지나가요. 이제 마카 뚜껑을 열어요. 매캐한 마카 냄새가 반갑다며 코끝을 건드려요. 그 기분이 나쁘지 않아요. 종이 위에 제 일상이 멈추자 리스본이 진심 제 도시인 것 같아요. ‘왜 진작 안 한 거야?’ 자신을 타박하며 그동안의 무심함에 대한 짐을 덜어요.
계속 도시를 그리고 싶어요. 여행하며 찍은 도시 사진을 뒤지고 마음에 드는 사진을 골라 그릴 때마다 그때의 감성으로 돌아가고 여행자로서 즐겼던 그때의 흥분을 그리워해요. 지금 제가 사는 이 도시도 제 스케치북에 멈출 거예요. 엄마는 어때요? 가끔 엄마가 보내신 친정집 주변의 꽃 사진을 보며 그 공간과 하나가 된 엄마를 상상해요. 이참에 엄마도 다시 그림을 그리시는 게 어때요? 제 그림 재주는 다 엄마에게서 온 거잖아요. 어렸을 때 우리 가족이 살던 서교동 집이 생각나요. 지금은 큰 건물이 들어서서 없어졌지만 그 집, 참 예뻤어요. 제가 그 집을 그린다면 어떨까요? 그래요, 그 집을 그려야겠어요. 왜 진작에 생각을 못 했을까요? 엄마, 사진 좀 찾아서 보내주세요. 서울을 추억하는 좋은 방법이 될 거예요.
서울, 아니 한국을 그리워하며, 엄마 딸 승연 드림
피게이라 광장, 리스본, 포르투갈
그림 by 옐로우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