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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이의 유럽일기 Jul 15. 2019

독일에서 지갑을 잃어버렸다


그 날은 조금 정신이 없는 날이었다. 무슨 일을 해도 집중이 잘 안되고, 별 거 아닌 일에 괜스레 짜증이 났다. 한 달에 한 번 오는 그 시기인가 싶으면서도, 에이, 그런 일에 내 하루가 조종당하는 건 싫어! 라고 믿고 싶어서 애써 집중해보려 하지만 잘 되지 않았다. 어쨌든 정신이 산만한 이 날은 평소에 해오던 일을 하기조차 버거운 날이었다. 그래도 더 예민해지지 않으려, 일상 속에 좋은 것들을 찾으려 애쓰며, 꾸역꾸역 하려고 했던 일들을 해치웠다. 저녁에는 한 친구와 6시 즈음 만나 공원을 걷고 저녁을 함께 먹기로 했다. 8시부터 실시간 온라인 수업이 있었기 때문에 다소 빠듯한 일정이었다. 약속을 취소할까 말까를 몇 번이나 생각하다가 결국 강행하기로 했다. 친구에게 빌리기로 한 물건도 받아야 했고, 모처럼 날씨가 좋으니 공원을 산책하는 것도 기분 전환에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5시 30분. 이제 출발해야 하는데 하던 일이 마무리가 되지 않아 늑장을 부리다 보니 그새 10분이 더 지났다. 부랴부랴 가방을 챙겨 튀어나갔다. 시간이 좀 아슬아슬하긴 했지만 그 날따라 자전거가 타고 싶었다. 아니, 그런 것도 있고 사실 내 교통카드는 파트타임용이라서 오후 4시-6시에는 이용할 수가 없다. 그래서 3천 원을 더 내느냐 무료로 시티자전거를 타고 가느냐를 고민하다가 날씨도 좋으니 자전거를 선택했다. 교통카드 이용시간과 상관없이도 종종 시티 자전거를 타 왔기 때문에 그것이 유독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날 내가 가야 했던 길은 평소에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처음 가는 길이었다. 그래서 틈틈이 계속 구글맵을 들여다보고 방향 감각을 잃지 않으려 애쓰다 보니 예상보다 속도가 더욱 더뎌졌다. 체력이 후달려서 자전거 타는 속도가 남들보다 느린 것도 한몫했다. 구글은 분명 자전거로 20분이 걸릴 거라고 했는데, 나는 29분이 걸렸다. 이미 늦었다. 30분이 넘으면 추가 요금이 지불되는데 그것도 생각 못하고 헐레벌떡 달렸다. 




약속 장소 근처의 자전거 주차장에 도착해서 자전거를 반납하는데 뒤에 실었던 가방이 뒷바퀴와 본체 사이 어드매에 끼어있었다. '아이고' 정말 아끼는 가방인데 이렇게 마구잡이로 더러워지는 게 벌써 두 번째다. 가방아 미안해, 하며 검은 먼지를 털며 서둘러 친구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자전거 페달을 신나게 밟느라 땀을 삐질삐질 흘리는 나에게 주스를 사주겠다며 주스 가게로 나를 데리고 간 친구, 미안한 마음에 내가 계산하려 하는데, 아뿔싸! 지갑이 없었다. '설마 가방에서 튕겨져 나갔나?'라는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평소 나의 행실을 되짚어 보면 "집에 두고 온 거 아냐?"라는 친구의 말이 더 설득력이 있었다. 자전거를 타느라 지친 몸과 약속 시간에 늦어 친구에게 미안한 마음을 챙기기 바빠 나는 더 깊이 생각하지 않고 집에 두고 온 것이려니 결론지었다. 










그렇게 그때까지는 아무것도 모르고 신나게 공원에서 어린아이들 틈바구니에 끼어서 아주아주 드물게 뭍으로 올라온 거북이를 보며 꺅꺅거리고 있었다. 8시에는 집으로 돌아가 10시 30분까지 온라인 강의를 듣고 지친 몸을 쉬고 있는데 갑자기 친구가 말했다. "집에 지갑 있었어?" 




솔직히 완전히 까먹고 있었다. 당연히 집 어딘가에 있을 거라 생각하고 단 1그램의 걱정도 하지 않았다. 어쨌든 친구의 말에 생각이 나서 방 이 곳 저곳을 뒤지며 지갑을 찾기 시작했다. 처음엔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나는 점점 리듬이 사라지고 굳어지는 얼굴을 느꼈다. 






지. 갑. 이. 없. 다.? 






아무리 내가 덤벙거리고 집안에서 물건 잃어버리기의 고수이지만 바로 어제까지 사용했던 지갑이 이 정도로 안 보인다는 것은 분명히 밖에서 흘린 것이 분명했다. '집 안에 어디 두고 못 찾는 거 아니야?'라고 친구가 말했지만 아무리 뒤져봐도 지갑은 집에서 발견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냉정하게 생각할 겨를도 없이 멘탈에 '바스스' 금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안 그래도 온종일 허둥대느라 올라오는 짜증을 꾹꾹 누르고 있었는데 '지갑 실종 확인'이 되자마자 인내심에 한계가 왔다. 




'아...'




한국에서 지갑을 잃어버려도 귀찮은 일 투성이인데, 해외에서, 독일에서, 모든 게 다 들어있는 지갑을 잃어버리다니. 얼마나 성가실지 안 봐도 비디오였다. 현금은 그래, 찾을 기대도 안 했다. 다만 그 안에 들어있는 모든 신분증과 카드들을 다시 발급받는 것이 너무나도 귀찮았다. 한국에서 발급받아온 신용카드도 꽤 자주 쓰는데 그건 여기서 어떻게 재발급을 받지, 헬스장 멤버십 카드 분실 시 재발급 비용이 얼마더라, 체크카드 정지시켜야겠지, 이 카드도, 저 카드도... 우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 




정신이 헤롱헤롱 해진 나에게 친구는 '독일에서는 보통 사람들이 길에서 지갑 주으면 다 경찰서에 갖다 주는 편이야.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라고 위로했다.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긴 한데. 혹시나 못 찾으면 어떡하나 나는 계속 걱정이 됐다. (주특기 걱정 부풀리기가 시전되었습니다) 경찰서에 가면 또 뭐라고 하지? 독일 경찰은 무섭다던데. 경찰이 영어로 말을 안 해주면 어떡하지?... 

상상 가능한 온갖 '어떡하지?'가 머릿속에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걱정을 하다 하다 더 이상 걱정하는 것도 힘이 들 지경이 되었을 때, 나는 숨을 크게 한 번 들이쉬고 내쉬었다.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너 지금 오버하는 거야, 미련을 버리고 집착을 버려. 인연이면 다시 돌아올 테고, 아니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겠지.' 그러자 신기하게 툭 하고 걱정 꾸러미가 바닥으로 떨어져 나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마음이 조금 편안해지자 습관처럼 손은 핸드폰을 향했다. 알림 센터에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페이스북으로 메시지가 왔다는 알림이 떠있었다. 이름으로 추정해 보건대 베트남 사람인 것 같았다. 도착한 메시지는 2개, 마지막 메시지의 미리보기는 'Photo', 사진이었다. 순간적인 생각으로는 이름 모를 누군가가 이상한 사진을 보낸 스팸 메시지 같은 것이 아닐까 싶어서 메시지를 확인하지 않고 바로 삭제를 하려고 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하고 메시지를 확인했는데, 이게 웬걸!, 사진 속에는 내 커다랗고 강렬하게 핑크 핑크 한 지갑과 나의 어학원 학생증이 함께 포개어져 누워있었다. 






너네 왜 거기 있니


 



독일어로 정중하게 쓰인 메시지의 내용은 이러했다.




'안녕하세요, 'Le'레스토랑의 주방장입니다. 저희는 오늘 귀하의 핑크색 지갑을 발견했습니다. 지갑을 찾으시려면 저희 레스토랑으로 방문해 주세요. (이하 주소) 감사합니다. Le Restaurant'








휴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





일단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그리고 핸드폰을 제대로 확인도 하지 않고 걱정하느라 온갖 오두방정을 떨던 나 자신이 매우 창피해졌다. 하지만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지갑을 습득한 외국인이 페이스북 메신저로 내게 연락을 하리라고 말이다. 어쨌든 대뜸 페이스북 만세 만세 만만세라도 외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리고 오늘 지갑을 찾으러 레스토랑을 찾았다. 마음 같아서는 누군가와 함께 찾아가 밥 먹고 매상이라도 올려드리고 오고 싶었는데 갑자기 같이 가줄 친구가 당장은 없었다. 지갑을 찾으러 가는 내내 지갑을 찾아주신 보상을 어떻게 해야 하지 고민이 되었다. '우리나라처럼 사례금을 좀 드리면 될까?, 기분 나빠할 수도 있으려나?' 고민하던 나는 독일인 친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나: 

What is the manner for this kind of situation? Should I give some money to him for finding and keeping my wallet? We do that in Korea but I don't know about German culture.

이럴 땐 독일에서 보통 어떻게 해? 지갑 찾아줘서 고맙다고 사례금 드려야 할까? 한국에선 그렇게 하는데 독일은 어떤지 잘 모르겠어.



친구: 

You could offer some money. "Finderlohn" 

'Finderlohn'(발견에 대한 사례금)이라고 해서 돈을 줄 수도 있어. 

But he will most likely say no.

하지만 대부분은 사양할 거야. 

Then you can say "but please I insist."

그럼 "제발요, 제가 드리고 싶어서 그래요."라고 해. 

They will say no again.

그럼 또 사양할 거야. 

Then you say thanks so much and leave. 

그러면 정말 감사하다고 이야기하고 나오면 돼.

Or you can end with saying,

"well I'm happy to be your guest anytime soon. So nice and helpful... food will be Great as well.

아니면 마지막에 이렇게 얘기해도 돼. 

"조만간 손님으로 다시 오고 싶네요. 너무나 친절하게 도와주시니 분명 음식도 훌륭할 것 같아요."








앞의 내용은 뭔가 한국과 비슷해서 감흥 없이 읽었는데 친구의 마지막 말에 쪼금 감동했다. 이런 멋있는 멘트 같으니라고! 하지만 오글거려서 말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 저 말을 독일어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나는 몰라(...) 그걸 독일어로 물어봐도 이 짧은 시간 내에 외워서 말할 자신이 없었다. 심지어 이미 가게는 코앞이었다. 에라, 모르겠다. 일단 문을 열고 들어갔다. 내가 손님인 줄 알고 반겨주시는 분은 사장님의 포스를 풍기고 있었다. 나는 조금 어색하게 '지갑 찾으러 왔는데요.'하고 어설픈 독일어로 입을 뗐다. 사장님은 나를 반기며 카운터로 데리고 갔고 그런 나를 알아본 듯 주방에서 주방장님이 나왔다. 메시지를 보낸 분이냐고 하니 그렇다 했다. 나는 뭐라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연신 감사하다고 했다. 본인이 맞는지 깐깐하게 검사는 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선뜻 지갑을 내어주시며 빠진 게 없나 확인해 보라고 하셨다. 점심시간 끝무렵이라 아직은 좀 바쁜 시간대 같았는데도 웃으며 인사해주셔서 더 감사했다. 어떻게 지갑을 찾으셨냐고 하니 가게 앞을 지나가던 누군가가 주워서 맡기고 갔다고 했다. 지갑을 열어보니 현금도 다 그대로 있고, 없어진 것은 하나도 없었다. 지갑 안에 들어있던 현금이 10유로짜리 지폐가 있어서 사례금으로 드리려고 슬금슬금 꺼내는데 사장님이 이미 내 손끝을 보시더니 괜찮다며 사양했다. 사장님과 주방장님께 번갈아 가며 다시금 받아주십사 했지만 극구 사양하셨다. 혹시나 지갑에 현금이 없을 경우에 드릴만한 것이 있을까 하고 집에서 챙겨 온 김을 한 봉지 꺼내어 드렸다. 독일어로 김을 뭐라고 하는지도 몰랐다. 찾아보고 올 걸 후회했지만, 바쁜 식당에서 그러고 있기가 좀 뻘쭘해서, "한국 음식이에요." 여전히 어설픈 독일어로 짧은 설명을 하며 김을 드렸다. 주방장이어서 그런지 음식에는 관심을 보이며 선뜻 받아주셨다. 친구가 알려준 멋진 말을 하며 나오고 싶었지만, 더듬더듬 "저, 다음에, 또 올게요. 여기, 밥 먹으러."라고 인사를 드리고 가게를 나왔다. 









그렇게 함부르크 거리에서 찾아온 예상치 못했던 사람들의 친절함에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다. 속상했던 마음은 햇볕에 뽀송하게 말린 새하얀 이불처럼 가벼워졌다. 이 좋은 기분을 공유하고 싶어서 평소에 자주 들리는 페이스북의 독일 유학생들 그룹에 사진과 함께 짤막하게 글을 올렸다. 올린 지 2시간 만에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좋아요를 눌러주었다. 드문 일이다. 사실 요즘 좀 인종차별 등으로 인해 속상한 글들이 많이 올라와서 마음이 안 좋았는데, 조금이라도 좋은 일도 있다는 걸 공유하고 싶었다. 그 마음이 사람들에게 가닿은 것이면 좋겠다. 앞으로 왠지 그 식당에 자주 가게 될 것 같다. 독일 친구의 마지막 말처럼, 이렇게 친절한 사람들이 만드는 음식이라면, 그 맛도 분명 훌륭할 것 같으니까.





지갑을 찾고 나온 뒤 한결 편안해진 마음으로 찍은 사진







글쓴이

필명 노이. 

30살이 되기 전에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쓰려고 독일에 왔다가, 독일이 너무 좋아서 3년째 거주 중입니다.

탈회사원을 선언한 뒤 먹고살기 위해 독일에서 글 쓰고, 영상 찍고, 구매대행 일을 하고 있어요.


- 글: 노이

- 커버 이미지: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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