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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이의 유럽일기 Mar 17. 2024

다소 야박한 도서관


애증의 도서관에서 찰칵


1(eins). 다소 야박한 도서관



금요일 밤 23시 45분. 도서관 구석 자리에 앉아 모니터에 빨려 들어갈 듯이 앉아있는 유학생. 도서관 내에는 곧 문을 닫는다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온다. 원하는 만큼 수정을 하지 못한지라 마음이 급해진다. 노트북 충전기 뽑고 마우스 클릭 두 번 하고, 충전기를 가방에 대충 욱여넣고 마우스 클릭 두 번 하면서 챙기는 시늉을 하며 서둘러 이메일을 보냈다. 15분 남았으면서 이메일 보내는데 왜 이렇게 산만하게 굴고 있냐면,



“10분 뒤에 도서관 닫습니다.”



독촉하는 이 도서관 직원들 때문이다. 말은 저정도로만 하지만 분위기와 눈빛은 '지금 당장' 가방을 들고 밖으로 나가라는 압박이 가득 담겼다. 기분 탓이 아니라 그간 겪고 들은 것이 많다. 과제 마감이 10분 뒤라 이메일만 보내면 된다고 버티던 과친구가



"지금 안 나가면 경찰을 부를 겁니다" 



라는 말도 들은 적이 있었다. 화장실도 이미 문이 잠겨있다. 물론 한 명 두 명 사정을 봐주다 보면 퇴근이 늦어질 거다. 불도 늦게 끌 테니 전기 에너지도 더 쓰게 될 거고, 모든 게 다 '추가' 비용이 될 것이다. 그래도 도서관에서 술을 마시는 것도 아니고 과제하다 그러는 건데 이렇게 야박할 일인가 싶다. (물론 모든 직원이 그러신 건 아니지만 대체로 그렇다.) 그러면서도 이곳에 굳이 오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아니, 올 수밖에 없다. 이곳이 유일하게 함부르크에서 밤 12시까지 여는 도서관이기 때문이다. 함부르크에서는 독서실은커녕 스터디 카페 같은 곳은 상상도 못 한다. 일반 카페도 엉덩이 붙이고 앉아 길게 공부할 수 있는 곳이 몇 없다. 대부분의 도서관이나 카페는 늦어도 오후 8시면 문을 닫는다. 이런 곳에서 12시까지 열어주는 것 자체만으로 감사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시험 기간이면 이 도서관을 찾는 학생들이 많고, 혼자 앉을자리 하나 찾기 힘들 때도 왕왕 있다.



그러니까 내가 공부하고 싶을 때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은 크게 세 가지다. 도서관, 카페, 집. 각각의 장단점도 확실하다. 집은 아무래도 집중이 잘 되지 않는다. 신경 쓰이는 집안일도 계속 눈에 들어오고, 보는 눈이 없으니 쉽게 해이해진다. 결국 카페냐 도서관이냐 두 가지 중에 고르게 된다. 나는 카페형 인간이다. 너무 조용한 도서관에서는 오히려 졸음이 쏟아져서 몰입하기까지 시간이 더 오래 걸리고 힘들다. 하지만 그렇다고 공부할 때마다 카페에 가는 것은 유학생의 지갑에게는 조금 부담이 되기 마련이다. 결국 나는 스스로를 도서관에 적응시키려고 무진 애를 썼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한국에 비하면 여기서는 대학 등록금이 훨씬 저렴한데 거기서 아낀 비용을 카페에 투자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래도 여전히 선뜻 그럴 수 없는 건, 두 번째 학사로 부모님 마음 고생 시키고 있다고 (속으로 미안한 마음을 간직한) K장녀 나름의 노력이다. 







2(zwei). 인턴십 vs 교환학생



휴, 그래도 어찌어찌 또 과제 하나가 끝이 났다. 이번 과제는 사실 다른 과제에 비하면 어려움은 덜 했다. 왜냐면 과거의 내가 이 학교를 들어오기도 전에 이 과제를 미리 해두었기 때문이다. 그게 뭐냐면 독일어로는 프락티쿰(Praktikum), 한국어로는 인턴십이라고 하는 그것이다. 우리 과는 인턴십이 필수이다. 한국에서 대학을 다닐 때는 인턴십을 한다는 게 취업에 유리한 것이었지, 졸업과는 관련이 없었는데, 여기는 졸업 조건 중 하나가 인턴십이나 교환 학생 둘 중에 하나가 필수라는 것이 좀 신기했다. 처음 입학해서 그 사실을 알았을 때 마음은 반반반이었다. 



‘교환학생이라니! 한 번쯤 가보고 싶었는데 한 번 도전해 볼까? 유럽에서 교환학생이라니 너무 재밌겠다!’

‘하지만 졸업 후 취업을 생각하면 아무래도 인턴십이 더 도움이 되겠지?’

‘교환학생은 뽑히기 어려운 것 같던데 잘 될까? 인턴십을 하려면 독일어를 더 잘해야 할 텐데 할 수 있을까?’



호기심과 열정이 넘치는 나, 하지만 현실을 걱정하는 나, 그 모든 상황을 또 걱정하는 나. 이렇게 세 가지 생각이 왔다 갔다 했다. 20대의 나는 워홀로 일하는 것을 선택했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그때 해보지 못했던 교환학생을 해보고 싶었다. 교환학생을 신청할 수 있는 학교 리스트에 있는 대부분의 학교가 유럽에 있는 학교였지만, 그래도 그중에 맨 아래 주석처럼 조그마하게 적힌 익숙한 이름도 보였다. '성... 균... 관... 대...? 내가 아는 그 성균관대?'. 우리 학교가 한국으로도 교환 학생을 갈 수 있다니 좀 신기했다. '이참에 한국으로 가서 한 6개월 그리웠던 한국을 듬뿍 즐기다 올까, 외국어 스트레스도 좀 그만 받고 싶다', 하는 생각도 들었더랬다.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어색했다. 선택지가 있다면, 나는 보통 한 번도 겪어보지 않은 새로운 것을 경험하는 것을 선택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 때는 많이 지쳐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이제 나도 나이가 든 것인지 고국에 돌아가 편히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이런 생각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그저 나답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런 고민들을 주위에 이야기하자 뜻밖의 옵션이 하나 더 나왔다. 예전에 일을 했던 경력이 있는 사람은 따로 인턴십을 새롭게 하지 않아도 그 경력을 가지고 보고서를 써도 학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새롭게 인턴십이나 교환학생을 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원한다면 할 수 있었다. 곰곰이 생각하던 나는 결국 예전 경력에 대해 쓰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그 시간을 이용해서 다른 과목들에 더 집중하기로 했다. 이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교환학생을 신청할 수 있는 마감일이 다가오자 마음에 불이 붙었다. 안될 확률이 높다는 것을 알면서도 지원을 했다. 그리고 기쁘게도 1차에 붙었다. 하지만 역시 인생은 순탄치 않다. 갑자기 포트폴리오를 요구받았다. 지원한 학과가 시각디자인학과라 전혀 황당한 요구는 아니었지만, 문제는 내가 우리 학교에서 얻은 정보에는 그런 이야기가 없었다는 것이다. 알았다면, 안 넣었을 거다. 학교 측의 실수였지만, 그런 사정이 받아들여지기는 힘든 분위기였다. 결국 최종 결정권이 상대 학교 측에 있기 때문이었다. 내가 공부하고 있는 학과는 도시문화학. 과목 중 일부 시각적인 자료를 만든 적이 있지만, 시각디자인의 그것과는 성격이 많이 달랐다. 나는 포트폴리오 같은 건 태어나서 만들어본 적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래도 끝까지 최선을 다해보고 싶었다. 그동안 했던 과제 중에 시각디자인과 관련 있어 보이는 것들을 열심히 모아서 며칠 만에 얼렁뚱땅 포트폴리오를 만들었다. 포트폴리오는 결코 이렇게 짧은 시간 안에 되는 게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당연히 대차게 떨어졌다. 떨어졌지만 마음은 후련했다. 후회가 없었다. 



그래도 내가 단순히 나이가 들었다는 이유로 열정이 없어진 게 아니라, 그저 지쳐있었을 뿐이라는 것도 확실해졌다. 다행이라는 기분이 들었다. 뽑혔더라면 지금쯤 유럽의 다른 나라에 사는 이야기를 적고 있었을 텐데, 아쉬운 마음도 든다. 하지만 정말 원한다면 졸업을 하고서라도 언제든 다른 나라에 가서 살 수도 있다. 한 번의 기회를 잃은 것이 영원한 끝은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는 그 자유를 위해 살고 있으니까. 





3(drei). 2024년 11째주 마음 상태


사실 무엇보다 기록하고 싶었던 것은 내 마음 상태였는데, 도서관 이야기, 과제 이야기를 하다 보니 또 생각이 많아져 글이 길어졌다. 이번 과제 기간은 스트레스 관리가 평소보다 좀 더 어려웠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아무래도 아르바이트를 두 개를 하면서 과제를 하는 학기라서 그런 것 같다. 예전에도 이런 식으로 아르바이트 두 개 와 학업을 병행한 학기가 있었는데, 그때의 내 상태는 지금보다 조금 더 안 좋았던 기억이 있다. 그저 평범한 하루가 끝나고 집으로 가는 길에 눈물이 멈추지 않아 지하철을 타지 못하고 걸어갔던 하루가 생각난다. 이번 학기에는 다행히 그 정도는 아니지만, 체력적, 정신적으로 많이 지쳐있는 것도 사실이다. 줄일 수 있는 스트레스는 줄였다. 드롭해도 되는 과제도 드롭했다. 차라리 조금 더 냉정하게 바라보고 더 일찍 줄일 수도 있었을 텐데, 하고 싶은 일은 끝까지 시도해 보려는 내 자세가 어쩔 땐 좋지만, 어쩔 땐 좀 어리석다 싶을 때도 있다. 어차피 드롭할 거라면 일주일 일찍 드롭했으면, 학점에 영향도 가지 않고(일주일 전에는 시험 포기가 가능하고 일주일 전에 포기하면 그 학기 학점에 반영이 안된다), 차라리 더 여유롭게 휴식하고 회복한 뒤에 다음 과제로 넘어갈 수 있었는데 아쉬운 마음이 컸다. 그래도 이렇게 마음의 바닥을 친 덕분에, 다시 명상을 손에 잡게 되었다. 이번에는 선명상에 대해 조금씩 알아보고 있다. 그냥 앉아서 명상 5분, 10분. 그마저도 잘 안하는 게 그동안 나의 명상 패턴이었는데 선명상을 접하고는 못하던 결가부좌로 앉아서 명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오늘은 15분이라는 최대 기록을 세웠다. 내가 선택한 고통 앞에 담대하게 마주하는 연습을 하다 보면 언젠가는 내가 선택하지 않은 고통 앞에서도 담대해질 수 있겠지. 







글: 노이

사진: 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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