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을 바쁘게 시작했다. 숨 가쁘게 흘러가는 여러 이슈들 사이에서 정신 차릴 새 없이 하루가, 또 일주일이 지났다. 매일 비슷한 듯 다르게 역동적인 날들 속에서 이리저리 흔들리며 적당히 고통스럽고 적당히 보람 있고 적당히 머리 아픈 시간을 보냈다.
이상 연재를 늦은 변명이다.(글을 쓰다 자정을 넘겨 무려 이틀 지각이 되어 버렸다.) 매일 마감에 쫓기는 게 밥벌이 일상이라 그만큼 시간을 지키는 건 익숙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더 연재에 자신이 있었는데 결국 이번주는 늦고야 말았다. 남보다 내가 더 내 글을 많이 읽는 일기장 같은 공간이지만 그래도 연재는 하나의 약속이기에 반성 한 모금 해본다.
그 와중에 야구는 매일 챙겨봤다. 경기를 풀로 보진 못했지만, 결과는 항상 확인하고 웬만한 장면은 짧은 영상들로 섭렵했다. 출퇴근길에, 그리고 누워있을 때 유튜브와 인스타에 들어가기만 하면 굳이 검색하지 않아도 알고리즘이 A부터 Z까지 전시해 준다. 아 이 선수가 이랬구나, 이 팀 경기에서 이런 일이 있었구나, 아이고 이땐 왜 그랬대, 와 이런 기록이 나오다니, 하면서 다시 도파민이 도는 것이다.
이런 영상의 홍수 속에서 가장 기억에 남은 건 기가 막히는 경기 순간도, 감동적인 수훈 인터뷰도 아니었다.
9월 6일, KIA와 키움의 경기는 1회 초를 시작한 지 6분 만에 우천 중단됐다. 설레는 마음으로 광주 챔피언스필드에 앉아있던 사람 중 꽤 다수가 자리를 떠나는 대신 저마다 우산을 쓰거나 우비를 입고 그 자리에 남아있는 쪽을 택했다. 그리고 중계 카메라는 이내 그 사람들을 하나씩 비추기 시작했다.
화면 출처: KBO 유튜브 채널
똑같은 노란색 옷에 똑같은 가방을 멘 어린아이들은 빗줄기마저 즐거운지 손가락을 펴며 해맑게 웃는다. 함께 온 어른들은 그런 아이들 위로 커다란 돗자리를 들어 비를 막는다. 흰 우비를 입은 아빠와 아들은 똑같은 몸짓으로 팔을 흔들어 보인다. 우산이 없는지 비닐봉지를 머리에 쓴 어린이들은 화면에 잡히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서둘러 그 모습을 담으려 휴대폰을 꺼낸다. 캐스터와 해설위원은 "좀 기다려주세요, 사진 찍고 있어요. 이 친구들."이라며 시간을 벌어준다. 머리에 솜털이 난 아기를 보면서는 "오늘 오신 분 중에 가장 나이가 어리신 것 같다"라고 말한다.
아무런 대본도, 스토리도 없는 현장을 캐스터와 해설 위원은 있는 그대로 전달한다. 가을 야구를 코앞에 두고 각 팀의 승부가 치열한 요즘, 이 순간만큼은 야구가 아닌 사람들을 중계한다. 그 말투가 연신 다정하고 따뜻하다. 친구, 연인, 부부, 직장 동료, 화면에 잡힌 모두가 행복하게 웃고 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가 해맑게 손을 흔든다.
화면 출처: KBO 유튜브 채널
이런 장면을 언제 어디서 마지막으로 봤더라, 싶었다. 모두가 평온하고, 편안하고, 행복한 풍경. 복잡다단한 어제도, 뾰족했던 오늘도 잠깐 잊게 되는 장면. 더 이상 빗줄기는 아무 상관도 없는 듯 사람들의 모습 자체가 내용이 된다. 야구장엔 잔잔한 노래가 퍼진다.
이 특별한 하이라이트 영상 길이는 16분 52초다. 15초짜리 숏츠도 안 끌리면 휙휙 넘겨버리는 세상에서 17분짜리 '관중' 중계를 단 한 장면도 스킵하지 않고 끝까지 봤다. 다른 사람도 나와 비슷했는지 이틀 만에 조회수가 12만이 돼있다. 댓글은 수백 개가 달렸다.
화면 출처: KBO 유튜브 채널
올해 스무 번을 훌쩍 넘는 직관을 다니며 이렇게 비가 오는 날들도 있었다. 그럴 때면 뻥 뚫린 야구장이 야속하기도 했지만, 결국 그 시간들은 기어코 진하게 생겨지곤 했다. 지붕 없는 잠실야구장 복도에 옹기종기 모여 핫도그를 먹은 것도, 빗물이 다 들어가 밍밍해진 맥주로 건배를 했던 것도 어떤 승리의 장면보다 먼저 생각나는 순간이 됐으니 말이다.
올해 5월의 어느날, 비 내리는 잠실야구장
한명재 캐스터의 멘트가 그래서 더 좋았다.
"모르겠습니다. 10년, 20년, 30년 후에는 모든 야구장이 돔 구장으로 바뀌면 이런 또 낭만이, 야구장의 낭만이 사라질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때까지는 많은 야구팬들이 이런 낭만을 갖고 야구장을 찾을 수 있는 그런 공간이 됐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