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최소한의 경제적 자유'는 잘 살기 위한 기본 중의 기본입니다
혹시 <2화, 진짜 현실을 배우는 생존경제학, '최경자'> 편에서 보여드린 이 그래프 기억나시나요? 직장인이 살아가는 동안 벌 수 있는 수입과 소비하게 되는 지출을 보여주는 이 그래프는 직장인의 마이너스 삶을 가감 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이너스란 이야기를 듣고 제 주변에 계신 분이 묻더군요. 마이너스인데 어떻게 경제적 활동을 할 수 있냐고요? 맞습니다. 정상적인 경제생활은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빚’을 안고 살아갑니다. 한마디로 ‘빚’으로 ‘마이너스’를 메꾸며 살아가는 것이고, 결국 더 나이가 들어서는 그야말로 빈곤한 노후를 맞이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겁니다.
한번 생각해 볼까요? 왜 대한민국의 가계부채가 무려 1,300조나 될까요? 대한민국 전체 인구수를 5,100만 명으로 계산하면 1인당 약 2,500만 원이나 되는 빚을 가진 것이고, 4인 가족 기준으로는 1가구당 무려 1억 원의 부채를 안고 살아가는 겁니다. 1억! 엄청난 금액 아닌가요? 사실 이 돈이 수중에 있어도 모자를 판국에, 족쇄나 다름없는 빚이라니요. 이러니 우리의 삶이 시간이 가면 갈수록 팍팍해지고 힘들 수밖에 없는 겁니다. 빚 때문에 고통받을 수밖에 없는 거고요.
자, 우리는 이렇듯 예측되는 마이너스의 삶을 반드시 바꿔야만 합니다. 어떻게 바꿔야 할까요? 이번에는 다른 그래프를 보겠습니다.
두 그래프 사이에 어떤 차이가 보이시나요? 틀린 그림 찾기 같죠? 눈을 크게 뜨고 잘 보시면 2가지 차이점이 보일 텐데요, 하나는 지출을 나타내는 파란선의 높이가 확연히 낮아지고, 반면에 수입선은 좀 더 높아졌다는 점입니다. 이는 지출이 낮아짐으로써 수입이 조금 더 많아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주 좋은 현상이죠? 다른 하나는 수입과 지출의 변화로 인해 A, B, C, D 영역의 관계가 바뀌어졌다는 점입니다. 이렇게 말이죠.
오호~ 2화에서 말씀드린 최경자의 산수 공식이 성립되었네요. 이로써 마이너스의 삶이 플러스로 바뀔 수 있게 되었습니다. 참 쉽죠? 맞습니다. 그래프 상으로는 참 쉽습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이런 그래프의 모습으로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그야말로 ‘상당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뼈를 깎는’이란 말 대신 ‘상당한’이란 표현을 사용한 이유가 있습니다. 경제적 삶을 마이너스에서 플러스로 바꾸는 것이 많이 힘들고 어렵긴 하지만, 하려고 마음만 먹는다면 결코 불가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장담컨대, 의지만 있다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저는 경제적 삶의 개선이 자기 계발과 동일하다고 생각하는데요, 꾸준히 그리고 된다는 의지만 가지고 실천한다면 얼마든지 개선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자,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플러스의 삶을 만들어 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키워드는 단 하나, 바로 ‘절약’입니다. 모든 게 절약에서 시작됩니다. 아마 이 단어를 보고 ‘애걔~’ 하시는 분들, 분명 많으실 겁니다. 하지만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절약’하는 삶을 실천하지 못한다면, 절대 마이너스의 삶을 플러스의 삶으로 전환시키긴 어렵다고요. 아, 한 가지 다른 방법은 있습니다. 수입을 현재보다 50%~100% 이상 늘려 마이너스를 메꿀 수 있을 정도로 버시면 됩니다. 만약 그럴 수 없다면, ‘절약’이 유일한 키워드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절약이란 단어를 구태의연하게 생각하고 터부시 하는 경향이 생겼습니다. 왜 그럴까요? 왜 절약한다고 하면 궁상맞아 보이고, 찌질해 보이기까지 하는 걸까요? 그것은 이 사회가, 즉 자본주의 사회가 그렇게 만들어 놓은 겁니다. 우리의 사고방식을 아끼고 절약하며 사는 사람에 대해 찌질이,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으로 생각되도록 사회 분위기를 몰아간 겁니다. 그렇게 돼버린 이유가 있습니다.
자본주의란 돈이 모든 것을 주도하는 시스템입니다. 돈이 생명체처럼 살아 움직이며 새끼(이자)까지 치죠. 이렇듯 살아 있는 돈이 멈추지 않고 혈액 순환하듯 잘 돌아가는 상태를 우리는 ‘경기가 좋다’ 또는 ‘호황이다’라고 말합니다. 돈이 돌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소비입니다. 소비가 많이 이루어질수록 경기는 좋을 수밖에 없죠. 하지만 소비에는 구분이 없습니다. 자신이 가진 돈으로 소비하든, 빚을 내서 소비하든 소비의 규모만 중요시됩니다. 소비만 활성화되면 어찌 되었든 경제는 성장하게 되어 있으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소비는 미덕이고, 절약은 찌질한 것, 피해야 할 것 그리고 나쁜 것이란 인식이 은연중 우리들 머릿속에 심어져 있는 겁니다. 아시겠죠?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죠. 개인은 마이너스 삶을 살 수밖에 없는데, 빚을 내서라도 소비하라뇨? 뭔가 잘못된 거 아닌가요? 소비할 여유가 돼야 소비할 수 있는 겁니다. 여력이 되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부채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아껴야 합니다. 절약해야 한다는 이야깁니다. 물론 경제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소비가 활발히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모든 개인이 그럴 수는 없습니다. 한 국가의 경제성장은 개인 주도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정부와 기업이 이끌어 가는 겁니다. 개인의 경제상황이 좋아지면 당연히 소비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경제성장을 위해 개인이 소비를 주도해야 한다는 명제는 자본주의(혹은 정부나 기업)가 의도적으로 만들어 놓은 허울 좋은 논리라 할 수 있습니다.
드디어 마이너스의 터널을 막 벗어나기 시작한 직장인 A 씨. 연봉의 50%를 모아 지속적인 투자를 하다 보면 늦어도 5, 6년 후에는 8,000만 원의 빚을 청산함은 물론, 일정 규모의 자산까지 보유하게 될 것입니다(4~6화 참조). 그동안 A 씨 가족은 절약하며 사는 생활에 적응함으로써, 보다 적은 금액으로도 사는데 아무 문제도 없게 되겠죠. 또한 이들의 삶은 그림 2에서 그림 3의 그래프, 즉 마이너스에서 플러스의 삶으로 바뀌게 될 것이며, 결과적으로는 최경자의 산수 공식과 일치하는 인생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어떤가요, 매우 바람직해 보이지요?
하지만! 그래도 뭔가 아쉽습니다. 그림 3의 그래프를 잘 보시면 최경자의 산수 공식을 성립시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치명적인 약점 하나가 숨겨져 있습니다. 뭘까요? 혹시 찾아내셨나요? 잘 보시면 전반적인 경제적 삶은 분명 플러스지만, 60대 중반 이후부터의 수입은 지극히 낮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뭐 당연한 거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60대 중반이라면 당연히 직장에서 은퇴했을 나이이고, 이때부터는 직접 벌기 어려우니 연금으로 생활해야 할 것이며, 연금이란 것이 분명 어느 정도 한계가 있을 테니 말이죠.
맞습니다. 노후에는 연금 외엔 남는 게 없으니, 직접 돈을 벌던 시절과 비교해 수입이 많이 낮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생각일 겁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 세상에 ‘당연’ 한 것은 없다고요. 그저 당연할 것이라 미루어 짐작하는 그 ‘생각’만 있는 거라고요. 말장난 같죠? 하지만 잘 곱씹어보면 이 말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데요, 당연함을 당연함으로 여기지 않는다면 그 당연함은 특별함으로 바뀔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다는 겁니다. 즉 노후를 연금으로만 생활해야 하는 시기, 그래서 낮은 생활수준도 어쩔 수 없어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생각의 당연함을 바꿀 수 있다면, 우리의 삶도 달라질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반드시 이러한 당연함을 바꿔야 할 필연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질문 하나 드리겠습니다.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죽음을 앞둔 노인들을 두 그룹으로 나누어 설문조사를 합니다. A그룹은 젊었을 때 성공하여 중년의 시기까지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살았으나, 갑작스러운 사업실패로 인해 노년기에는 금전적으로 매우 힘든 삶을 보내고 있는 노인들입니다. 반면에 B그룹은 젊었을 때는 정말 말로 형용하기 어려울 정도의 별의별 고생을 다했으나, 늦은 중년 이후 경제적으로 안정적이며 여유로운 여생을 보내고 있는 노인들입니다. 이분들에게 자신이 살아온 인생 전반을 돌아보았을 때 느끼는 행복지수를 적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자, 행복을 숫자로 표시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A그룹과 B그룹의 행복지수는 어디가 더 높았을까요? 여러분의 생각은 어떤가요? A그룹일까요, B그룹일까요? 이 조사가 모든 사람의 생각을 대변해주긴 어렵지만, 그래도 이 설문의 답은 B그룹이었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이 조사를 진행한 경제학자들에 의하면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필연적 이유가 있는데, 인간은 본능적으로 모든 사고와 감정을 과거보다는 현재와 더 연관시켜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하네요. 즉 지금이라는 현재가 풍요롭고 만족스럽다면 힘들었던 과거까지도 별 것 아니었던 것(‘그래, 그때 좀 힘들긴 했지’)처럼 여겨지며, 더 나아가 좋은 추억으로까지 생각하게 된다는 거죠. 이와 반대로 과거가 아무리 행복했다 할지라도 현재의 생활이 정말 힘들고 괴롭다면 과거의 행복까지 반감되며, 심지어는 그 행복이 과연 진짜였을까 하는 의구심까지 들게 된다는 겁니다.
이 설문조사가 의미하는 바는 이렇습니다. 젊었을 때 잘 살고 즐겁게 사는 것도 좋지만, 노년기의 삶이 불행하다면 스스로 생각할 때 자신의 삶이 매우 힘들고 고된 삶으로 비친다는 점입니다. 인간은 과거의 좋았던 기억 혹은 추억을 먹고사는 동물 임에는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추억만으로 삶을 지탱하기에는 이 사회가 너무 힘겹고 고통스럽습니다. 특히나 노년기에 힘이 빠지고 점점 자신의 몸조차 건사하기 힘들어지게 될 때 경제적 어려움까지 맞게 된다면, 노년의 삶은 그야말로 최악의 시기가 되고 말 것이며, 더불어 좋았던 젊은 시절마저도 암흑의 시기인 것처럼 생각됨으로써 마치 자신이 인생 전체를 잘 못 살아온 것처럼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노년에 경제적 안정은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 앞의 설문조사의 결과를 감안하여 생각할 때, 우리의 경제적 삶에 대한 그래프는 그림 4의 그래프처럼 개선되어야 합니다. 어떻게요? 노후에도 일정 수준 이상의 경제적 수입이 보장될 수 있도록 말이죠.
그렇죠? 그림 4의 그래프를 보시면 노후에 수입 절벽을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 수준 이상의 수입이 지속적으로 유지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제가 추구하는 진짜 ‘최경자’, 즉 ‘최소한의 경제적 자유’의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경제적 삶을 살 수 있다면 2가지 측면에서 ‘최소한의 경제적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는 더 이상 ‘마이너스’의 삶이 아닌, ‘플러스’의 삶으로 개선됨으로써 자본주의의 영원한 숙적이라 할 수 있는 ‘빚(대출)’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으며, 다른 하나는 노후까지 ‘돈에 대한 걱정 없이’ 자신의 살고 싶은 삶을 추구하며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여기서 ‘돈에 대한 걱정 없이’란 표현은 조금 구체적으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데요, 절대 흥청망청 써도 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제가 ‘경제적 자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반드시 그 앞에 ‘최소한’이란 단어를 붙인 이유는 자신의 수입과 지출을 온전히 관리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많이 번다할지라도 어느 순간 마이너스가 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수입이 일정할 수밖에 없는 직장인이 지출관리를 제대로 못할 경우는 더 말할 필요조차 없겠죠. 그렇기 때문에 수입의 한계 내에서 지출을 잘 관리하고, 더불어 투자까지 잘 병행해 나간다면, ‘최대한’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의 경제적 자유를 누릴 수 있을 것이라 말씀드리는 겁니다.
(17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