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전에서는 자부심을 ‘자기 자신 또는 자기와 관련되어 있는 것에 대하여 스스로 그 가치나 능력을 믿고 당당히 여기는 마음’이라고 정의한다. 자부심을 가지려면 자신에게 속한 무언가의 가치를 느끼고 감탄할 수 있어야 한다. 세상이 감탄해도 스스로가 만족스럽지 못하면 무슨 소용인가?
자부심은 뛰어나다, 잘한다, 독특하다, 자랑스럽다는 긍정적인 자기 인식과 함께 한다. 저절로 주어진 것보다는 애써 가꾸고 키운 것, 정성스레 노력을 기울여서 만족스럽게 여기는 어떤 부분이다. 미모를 타고 나도 애써 가꾸지 않으면 자연스런 생기와 아름다움은 서른, 혹은 마흔 즈음에 저물어 버린다. 능력을 타고 나도 힘써 갈고 닦지 않으면 꼬리뼈의 흔적처럼 기능이 퇴화되어 버린다. 물려받은 재산이나 우연히 주어진 행운 또한 자부심의 근원이 되기에는 부족하다.
자부심이 강한 사람은 자신을, 혹은 자신이 뿌린 씨앗을 애써 가꿀 줄을 안다. 자신에 속한 것을 정성스레 가꿀 줄을 알기에 자부심이 커진 것일 수도 있다. 어느 한 영역에 대한 자부심이 확고하면 삶의 다른 영역으로 자부심이 확대된다.
내가 애써 가꿔와서 스스로에게 자랑스러운 영역은 무엇일까? 글 속에는 글 쓴 이의 삶의 자세와 인간성이 드러나기 마련이어서 설핏 두려운 마음이 든다. 누군가에게 읽혀질 만한 가치가 있는 글(삶)을 영영 쓰지 못하면 어쩌나? 시간과 정성을 기울인 일이 잘 풀려갈 때 자부심을 느낀 경우는 종종 있었다. 열심히 기획하고 추진한 일이 이루어지고 그 영향력이 발휘될 때의 성취감은 사전적 정의의 자부심에 가까웠다.
땅을 파서 우물을 찾아내듯 내 자부심의 수맥을 캐내고 싶다. 한 영역에 대한 자부심을 키우고 그로 인해 자신에 대한 믿음도 커진다면 고구마 줄기 캐내듯 다른 영역의 자부심 또한 커지리라, 그러면 쓸 만한 글 또한 따라 나올 것이다.
두려움이 마음을 잠식할 때, 내가 두려워하는 것들을 들여다보면 거기에 절실함이 있다. 여러 지인들이 책을 내고, 개인 사업을 시작하고, 자신의 길을 개척하고 있다. 그들에게는 있었고 나에게 없었던 것은 남다른 삶, 재능, 노력, 인품, 끈기, 콘텐츠 중 무엇일까? 남편에게 물어보았더니 내게는 ‘절실함’이 없었다고 답한다.
맞는 말이다. 그들에게는 절실함이 있었다. 하나만 파는 절실함 말이다. 그들은 절실하게 작가의 길을 파고들었다. 나는 한 화분에 키우는 여러 가지 식물처럼 내 한정된 시간과 에너지와 열정을 여기 저기 잡다한 것들에 쏟아 버리고 있었다.
절실함이 있다면 나머지 부족한 것들은 채워가고 메꾸어 가기 마련이다. 그러면 임계점에 도달하는 적절한 때가 성숙하여 올 것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에 각자 꽃 피는 식물처럼 나에게 가장 적합한 그 때가 오겠지.
“사람들이 수레바퀴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행복과 환희의 경험을 우연한 일로 여기고 그냥 넘겨버리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노력해도 대단한 존재가 되지는 못할 것이라는 연약한 자아도 한 몫 할 것이다. 지금보다 자신을 좀 더 사랑하자. 그 사랑이 자신만의 길로 이끌 것이다. 남들이 뭐라던 좋아하는 걸 계속하는 일, 미래에 대한 걱정이나 두려움 속에서도 행복의 끈을 놓지 않는 일, 남들의 이상한 눈초리 속에서도 황홀한 경험에 집중하는 일 그리고 그것을 10년이고 20년이고 계속해나가는 일, 그것이 수레바퀴에서 우리를 빼내준다.”
「살아갈 날들을 위한 통찰」, 안상헌, 북포스, 56페이지
매슬로우의 서랍
내 가슴에 층층이
크기가 다른 서랍이 있다
오전 일곱 시부터 새벽 한시까지
열여덟 시간을 서랍에 쟁여 넣는다.
맨 아래 칸, 생존
그 위에 한 칸, 안전
덩그렇게 가분수로 위태로이 쌓아올린
셋째 칸 친교
그리고 그 윗칸, 자존
몇 개의 구슬이 또르르 굴러다니는 맨 윗칸
내가 나라고 알고 있는 내가 아니다
내 동기의 서랍 속 첨예한 자존의 욕구
괴롭다는 건,
마음이 부대낀다는 건,
그 시간 속에 내가 살아 있다는 증거
가장 두려운 것에 가장 절실함이 있다
가장 절실한 것에 출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