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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젊음이 차갑지는 않았다

by 선향

나는 항아리이다.

중학생 때 쓴 첫 번째 항아리는 순수한 기쁨에 가득 차 있었다.


물빛 자그만

내 세계는

하늘을 땅을

가득 가득 담고 싶어 한다.


누군지

맨날맨날 아침이면

항아리 속에

태양을 던져 넣었다.


말없는 기쁨을

속으로 안고

항아리는 빛을 사랑한다.


어린 새싹의

빛나는 연초록

노오란 들꽃의

불타는 미소


물빛 자그만

내 세계는

속으로 불타는 태양을 담고

기쁨을 노래한다.


대학 졸업 무렵 쓴, 두 번째 항아리는 미열의 비겁함에 팔려나가는 항아리였다.


우리 젊음이

차갑지는 않았다

조금씩 분열하며

익어가는 항아리


속으로 공그르는 열을 담고

우리는 싸웠다

깨지지 않기 위해

데인 가슴에 굳은 못을 박으며


어느 날 너의 젊음은

허공을 찢는 불꽃이 되어

산산이 흩어지며

뜨거워야 한다


횃불로 타는 나는

완성의 비색을 경멸하리라

미열은 비겁자의 불안

너는 외치며…


너를 화인처럼 가지고

화덕 밖을 나온 우리는

모두가 미완성

우리는 너의 눈빛을 기억하며

이지러져 갔다


이제 팔림의 세월이 흘러

물빛 눈물이

조금씩 조금씩

항아리 속으로 고여 든다.


스물 서너 살쯤 이 시를 쓸 때 이 시를 쓰는 내 마음이 참 싫었고, 이 시도 싫었다. 미열의 불안을 견디며 취직을 준비하는 내가 비겁하게 느껴졌고 앞으로 살아가야 할 세월이 참 막막했기 때문이다.

세 번째 항아리는 세월 흐르기만 꿈꾸는 여위어 가는 항아리였다.


세월가도 흐르기만 꿈꾸는

강물을 담았다 아쉬웁게 놓아주더니

이제 청색 비색 모두 떠내려 보내고

부끄러운 흰 속만 남아

아닌 듯 행여나 기다리다

물풀 위에 앉은

젖은 풍뎅이를 힐끔거리네


꿈꾸는 강의 노래 들으며

몸살처럼 뒤척이다 여위어 가는 날들아

이제 날개 부서지는 노래 뱉으며

항아리는 제 꿈을 놓아 버렸네

은빛 물결로 떠내려가며

이제 항아리는 마냥 흐르기만 꿈꾼다네


네 번째 항아리는 편안히 쉬고 싶어 안주한 자리에 뿌리를 내려 빗물이 고여 드는 항아리였다.


쉬고 싶어 주저앉은

외진 자리에

가을과 겨울 봄이 지나갔다


그리고 나는 그새

뿌리가 제법 깊이

내려진 걸 알았다


안에서 둥글게 부풀고

밖에서 탄탄히 다져져

항아리엔 빗물 다시 고여 들고 있었다.


이제 항아리 속에 물빛 눈물이 제법 고여 든 세월이 지나 이 시들을 다시 읽어본다. 깨지지 않기 위해 뜨거운 열을 공그르며 우리는 조금씩 이지러져 갔고 데인 가슴에 굳은 못을 박으며 단단해져 갔다.


모두 쉽지 않았고, 모두 참 수고한 세월을 보내었다. 우리 젊음이 뜨겁지는 않았으나 차갑지도 않았다. 뜨겁게, 뜨겁게 살다간 이들은 일찍 산화하고, 미완성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은 세월을 견뎌왔다.


그렇게 미완성으로 어딘가로 팔려가 살아온 우리 속에 매일 태양이 떠오르고 물빛 눈물이 고인다. 장을 품듯 무언가를 잘 숙성시켜 가고 있는 이도 있고, 이미 이 세상에 내놓은 이도 있다.


완벽한 비색과 완벽한 모양을 가진 항아리는 비싼 가격으로 팔려 깨질 세라 장식장 안에 고이 모셔진다. 그렇게 살자고 우리가 이 세상에 온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생겨난 모양대로 색깔대로 놓인 자리에서 따스한 햇살에 몸을 데우고, 때로는 시원한, 때로는 세찬 바람을 맛보고, 변해가는 하늘빛을 고스란히 담아내는 물빛 눈물을 품어보려고 이 세상에 온 것일 수도 있다.


항아리의 노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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