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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을 Oct 22. 2023

보지 않고 선명한 장면

  병 앞에도, 고통 앞에도 아빠는 늘 담담했다. 가끔 암덩어리를 짚어보라며 쇄골 아래로, 배 위로 내 손을 가져다 댈 때도 그저 그것들이 거기에 그렇게 있다고 말해주는 것이었다. 

  하루는 아빠가 아주 아파하던 날이 있었다. 병원에 있고, 마약성 진통제를 처방받았는데도 너무 아파했다. 아빠가 마른 입술 밖으로 '아이고'하고, 소리 내서 내뱉었다. 어지간한 고통으로는 그런 소리를 내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렇게 참아 내는 자신을 자랑스러워하는 당신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런 모습을 딸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서 그 상황이 더 답답하고 짠했다. 그 와중에도 고통이 잦아든 잠깐의 순간에 아빠는 나에게 늦기 전에 집에 가라고 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으니 가라고 했다. 

  육체의 고통이란 누구도 나누거나 덜어줄 수 없다는 것을 그날 분명하게 배웠다. 고통은 자신만의 것이다. 큰 고통은 위로도 무색하다. 우리가 옆에 있어도, 주변사람을 그렇게 많이 의식하는 외마디 비명을 질러가며 아빠가 고통 속으로만, 육체 안으로만 가라앉는 것을 옆에서 지켜봐야 했다. 하지만 아빠가 돌아가신 이 시점에 아빠를 떠올리며 아직도 제일 눈물이 나는 장면은 이런 장면이 아니다. 

  고통을 호소하던 아빠의 모습도, 투병중에도 덤덤하게 포크레인을 타던 모습도 아니고, 마지막으로 봤던 깡마른 손으로 성호를 그으며 기도하던 모습도 아니다. 실제로는 보지도 못했던 장면이 나를 아직도 눈물 나게 한다.

  보지 않고 선명한 장면, 너무 생생해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나는 장면이 있다. 옆으로 돌아 누워있는 아빠의 뒷모습이다. 본 적 없는 장면 속에서 아빠는 집에 있는 동안 늘 그랬듯이 거실 소파 앞에 깔아 둔 라텍스 위에 누워있다. 그 옆에는 잠깐 허락된 밤잠을 자는 엄마가 있다. 방은 어둡다. 하지만 아빠의 하얀 내의가 덮인 등이 눈에 띄는 장면이다. 

  상상 속 장면이니 나는 아빠의 등을 넘어 앞모습도 볼 수 있다. 등 돌린 채 잠든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던 아빠는 가까이 가서 들여다보니 핸드폰을 보고 있다. 잠이 안 와서 잠깐 보거나 잠들기 직전이 아니다. 아빠는 열심히 검색하고 있다. '말기암 환자 완치확률' '기적의 민간요법'같은 것들이다.


  아빠가 떠나고 나서 엄마가 말해줬다. 아빠의 검색기록을 봤는데, 온통 살 방법을 찾고 있었다고, 핸드폰을 할 수 있었던 마지막 그 순간까지였다. 그러면서 우리에게는 늘 알아서 하고 있다고, 니 할 일이나 똑바로 하라고 말했다. 나는 그래서 내 일이나 한 딸이었다. 평생을 말을 안 들어먹다가 마지막에 듣지 말아야 할 말만 들어버린 청개구리 같은 딸이었다. 그런 내가 너무 싫어서 본 장면도 아닌 주제에 너무 많이 상상하고, 마치 실제 내 눈앞에 일어난 일인 것 같은 장면이다. 

  아빠와 나의 관계 속에서 대부분 후회되는 것들이 없다. 차라리 나를 죽이라고 앞빠 앞에 똑바로 서서 두 눈을 똑바로 뜨고 못할 소리를 한 것도, 아빠가 아프고 난 뒤에도 내 인생의 뒤틀린 점에 대해 아빠 탓을 한 것도 나는 후회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내가 아빠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듯이, 아빠에게 그렇게 대한 나도 이해해 주고 넘어가려는 심산이다. 그래서 적어도 나는 아빠한테 하고 싶은 말도, 화도 다 쏟아냈으니 후회는 없다고 생각했으나 보지 못하고 선명한 이 장면이 나의 후회다. 

  아빠가 괜찮다고 말해도 더 많이 걱정해 주고, 더 많이 알아보고, 더 많이 응원해주지 못한 것. 

  그리고 내 무심한 마음을 아빠도 알았을 것이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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