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그렇게 존재하는 나'에 적응하기
사회 속에 살다 보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잊게 되곤 한다.
인간관계에 집중하고 사회에서 내게 주어진 역할에 적응하면서 충실히 살다 보면, 그래야 하기 때문에 선택하는 모습 말고 '진짜 나의 모습'은 무엇인지 헷갈리게 된다. 그래서 한 때는 진정으로 얻고 싶어 했던 역할들과 진심이었던 관계들로부터 벗어나 모든 사회적 가면을 벗어던지고 그냥 나, 그저 나의 민낯을 찾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이미 수많은 관계와 역할 속에서 수십 년을 보냈는데 그것들과 본래의 나를 구분할 수는 있을까? 아니, 그렇게 하는 것이 의미가 있는 일이긴 할까? 물론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고유한 성향과 특성을 갖고 있고, 그 바탕 위에 정체성과 인격이라는 집을 지어나간다. 타고난 특성과 어린 시절에 형성된 자아는 성인이 되고 나서도 크게 바뀌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사춘기가 지나고 어른이 되어 다양한 상황을 경험하고 적응하고, 극복하면서 다양한 사람들이 어울려 살고 있는 사회 속 구성원으로서 살아갈 '자신만의 방식'을 체득한다. 그것 또한 나의 내적 특성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사회인으로서 필요한 '다양한 가면'을 만들어 씀으로써 좀 더 유연하게 대처하고 다양한 성취를 만들어낼 수 있다.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고, 사회에서 한 자리를 채우면서 '쓸모 있는 사람'이 되었다고 느끼는 것이다. 이는 사회적 동물인 우리에게 꼭 필요한 부분이다.
하지만 너무 오랜 시간 동안 관계를 유연하게 해주는 가면을 쓰고 있느라 다양한 욕구 중 사회와 관련된 부분을 제외한 '온전한 나 자신에 대한 욕구'는 후순위로 밀려나게 될 수 있다.
그러면 우리는 진정한 자신에 대한 질문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외면한다 해도 끊임없이 그 질문이 마음속을 맴돌게 될 것이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나는 왜 사는 걸까? 어떻게 살아야 허무와 무기력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
삶에 대한 본질적인 부분을 묻는 질문, 나의 존재를 되새길 수밖에 없게 하는 질문은 우리 안에 점철된 수많은 가면들 사이에서 '있는 그대로의 나로 머물러 싶은 내면의 욕구'가 꿈틀거리고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왜 무엇으로도 가릴 필요 없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마주하고,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했던 걸까? 그 당당하고 온전한 존재를 마치 수치스럽고 창피한 것, 취약한 것으로 명명하고 내 멋대로 그 얼굴을 가려두었을까?
내 생각에는 아마, 어색했기 때문인 것 같다. 사회적 문화와 분위기가 관계를 긴밀하게 정의할수록, 사람과 사람 사이의 틈이 문화적으로 밀접할수록 우리는 온전한 한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개인으로서의 나'를 잊게 되기 쉽다. 그래야 도태되지 않고, 그래야 따라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이 보는 나에 집중하느라 '있는 그대로의 나로 사는 것'을 잊어버린다면 우리는 자신의 삶에 온전히 뛰어들어 살 수 없을 것이다. 삶에 대한 회의와 공허의 감정이 들 때에는 '내가 나를 보는 관점'과 '타인이 나를 보는 관점' 사이의 균형이 깨졌을 때이다.
'사람들이 날 어떻게 보는지'에 두는 무게가 너무 클 때 내가 날 어떻게 보는지, 난 원래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확신이 점점 줄어들게 된다. 우리는 가면의 성에 갇힌 있는 그대로의 나와 좀 더 친해지고, 이해하는 시간을 가지면서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
그리고 남들과 아무 상관없는, 남들에게 드러내지 않아도 괜찮은, '그냥 그렇게 존재하는' 내가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여겨질 때, 우리는 다소 불확실하고 알 수 없는 이 세상에서 안정적으로 살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