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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도씨 Aug 24. 2023

번데기 혹은 고치

육아 대디, 퇴사하다

번데기 혹은 고치



거의 1년 만에 도서관에 갔다. 높은 언덕에 있어서, 산을 오르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그곳에 가면서 어색했다. 내 자리가 아니라는 감각이 나를 더 긴장하게 했다. 마침 소나기가 내렸다. 물바가지를 쏟는 듯이 내리다가도 햇살이 다시 기웃거리는 웃긴 날씨라 다행이었다. 몇 년을 항상 드나들던 후문이 아닌, 정문을 향해 들어가서 총무과에 도착했다. 어설픈 미소로 인사를 했다. 


과정은 간단했다. 몇 가지 설명을 듣고 이미 틀이 짜인 사직서에 서명을 하고, 퇴직금과 관련된 서류에 몇 번 더 사인을 하니 절차가 끝났다. 그제야 오히려 긴장감이 사라졌다. 나는 조금 더 자연스러운 미소로 그간 감사했다고, 건강하시라고 이야기했다. 본체만체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아쉽다는 말과 함께 안쓰러운 표정을 짓는 사람도 있었다. 일했던 사무실에 들렀다가 자료실 선생님들에게도 인사를 드렸다. 응원을 해준 사람들이 많았다. 나도 응원으로 답했다. 어디 좋은 곳에 가느냐는 질문에는 아니라고, 나는 한 동안 전업주부를 하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그중 몇 분이 살짝 눈시울이 붉혀지시는 것을 보게 되었을 때에는 나도 속이 상했다. 아, 좋은 사람들과 같이 일했구나 하고 새삼 깨달았다. 마중까지 나와주신 분들로 인해 집으로 돌아가는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아쉽다. 그렇구나. 아쉽구나. 퇴사를 하게 된 이유는 일단은 아이를 내가 주로 케어하기 위함이다. 거기에 말하기 어려운 개인적 사정이 몇 가지 있었다. 그렇게 정했고, 정해진 것뿐이다.


이제 나의 정체성은 육아 휴직자에서 완벽하게 전업 주부가 되었다. 후련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사실은 후들거렸다. 직장에 소속되어 있는 사회인이라는 것과 이어진 미약한 끈(휴직)이 끊어져 버린 것 때문이리라. 그래서 더 청소를 열심히 했다. 설거지를, 쓰레기통 비우기를, 빨래를… 그래야만 내가 여기 있는 이유를 정당화해 줄 것 같았다. 그러면 되는 걸까. 과연… 


미처 내가 하지 못한 몇몇 집안일들을 아내가 해놓았다. 나는 무거운 마음으로 아내에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아내는 전업 주부라고 모든 집안일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으냐고 물었다. 맞는 말이다. 내가 내세울 일이 그렇게 없었나 싶기도 했다. 스스로 그것 말고는 가치 없다고 여기고 있었나. 얼마 전에 주일학교 학생 한 명이 내 직업을 물었다. 곧 퇴직할 예정이라고 하니 그럼 백수세요 한다. 아니다. 전업 주부다라고 말했다. 아마 앞으로도 누군가 내게 하는 일이 뭐냐고 물어볼 것이고, 나는 간편하게 비슷한 답변을 댈 것이다. 그런다고 내가 집안일만 하는 사람이겠나. 동시에 글도 쓰고, 뭔가를 배우고, 누군가를 가르치고, 또 다른 뭔가를 이뤄가는 사람이 아니겠는가. 그런 복합적인 정체성을 가지고 있지 않겠는가. 제대로 집안일을 못해내면 존재 가치가 없어지는 것은 아닌 것이다. 


이렇게 스스로 사회적 위치를 증명해 내라는 보이지 않는 압력을 행사하고 있는 내게 설득하고 반문해 본다. 어젯밤에 아내는 내게 뭔가를 해보라고 권했다. 성취를 해보라고. 나의 마음을 안타까워해주고 응원해 주는 아내에게 감사하단 말을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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