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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지금 여기, 지구의 한복판

by 규란


지금 내가 있는 곳은 캐나다의 밴쿠버.

지구의 어느 지점이다.


남편이 해외 취업을 해보고 싶다고 했을 때만 해도 그런가 보다 했다. 지구인을 일렬로 쭉 세워놓고 게으름으로 순위를 매긴다면 그랜드 마스터 티어 정도일 남편이 무언가에 도전하기까지는 굉장한 시간이 걸릴 거였으니까. 만에 하나 해외 취업이 된다고 해도 그건 남편의 일이고 나는 여기서 내 일을 하면 되는 거였다. 부부라고 해서 운명 공동체가 될 필요는 없다고 그때의 나는 생각했다.


내가 하는 일을 좋아했다. 남들은 박봉이네 뭐네 했고 그건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누구나 매일 가슴속에 품는다는 사표 생각을 일 년에 한두 번 정도밖에 안 했고, 사표를 낸다 해도 일을 그만둘 생각은 없었다. 가능한 한 오래, 직장인이고 싶었다.

결혼 전 지금의 남편에게 호감을 느낀 건 그 역시 본인의 일을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직장인들이 입버릇처럼 달고 다니는 출근하기 싫다는 말을 한 번도 한 적 없는 사람. 지금 하는 프로젝트가 얼마나 기대되는지에 대해 말갛게 말하는 사람. 나는 자기 일을 좋아하는 그가 좋았다.


결혼 3년 차쯤, 남편이 오랜 기간 참여했던 극장판 애니메이션이 개봉을 앞두게 되었고 그는 조금씩 불안해했다. 국내에선 큰 규모의 애니메이션이 계속 제작되기 어려웠고, 된다고 해도 한 편을 위해 투자하는 시간이 너무 길었다. 이번 애니메이션에는 무려 7년이 소요됐다고 했다.

그 시간 동안 그는 한국에서라면 관리자 역할을 해야만 하는 나이가 되었다. 작업자로 남고 싶은 남편은 앞으로 다가올 직업 인생을 걱정했다.

지금의 남편을 만나기 전, 누군가 이상형을 물으면 ‘야망이 없는 사람’이라고 했다. 큰돈을 벌고 싶다거나, 사회적으로 명성을 떨치고 싶다거나, 회사에서 임원이 되고 싶은 꿈을 가진 사람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 욕심은 더 큰 욕심의 씨앗이 되고 그것이 사람을 불행하게 한다고 여전히 생각한다. 나는 그냥 가늘고 길게, 그리고 평화롭게 살고 싶고 내 반려자도 그러길 바랐다. (그렇다고 이 정도까지 바란 건 아니었습니다만…….)


남편의 고민은 그의 것만이 아니었다. 나도 서서히 관리자로 승진해야 하는 나이였고, 언젠가부터 팀장급으로 이직 제안이 오던 터였다. 하지만 실무자의 능력과 관리자의 능력은 분명 별도라고 생각하고, 내 인생도 관리 못 하는 내가 한 팀의 관리라는 건 끔찍한 재앙 같았다.

남편은 해외로 가면 나이에 상관없이 작업자로 일할 수 있을 것이고 하나의 프로젝트에 투입되는 시간도 훨씬 짧으니 다양한 애니메이션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 했다. 나는 그의 게으름을 알았으므로 반신반의하면서도 남편이 퇴사하는 것에 찬성했다. 우리에게는 좋아하는 일을 마음껏 하며 살 권리가 있고, 나는 진심으로 그가 그러기를 바랐다.


실행에 옮기기까지 꽤 시간이 걸릴 거라던 나의 추측은 완전히 빗나갔다. 돈 벌어올 사람이 있다는 안도였는지 몰라도 남편은 곧 퇴사를 했고, 그로부터 6개월 후에 캐나다의 한 회사로부터 입사 제안을 받았다. 더는 그를 게으르다고 놀릴 수 없게 된 나는 조금 원통하면서도 진심으로 기뻤다.

같이 갈 수는 없다고, 나는 내 일을 해야겠다고 도도하게 말하던 내 입에도 지퍼를 채웠다. 이직을 고려하고 있었고, 새로운 직장을 찾기 전에 3개월은 쉬고 싶었다. 그동안 같이 캐나다에 머물면서 정착을 도와주려던 게 처음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3개월 후에는 그냥 같이 캐나다에 살면서 프리랜서로 일해야겠다는 마음으로 바뀌었다.


그렇게 우린 몬트리올에 도착했다. 10년째 내 곁을 지키는 고양이 두 마리도 함께였다.

몬트리올의 우리 집은 아주 작았지만, 창문에는 하늘이 가득했고 큰 공원이 한눈에 내다보였다. 늘 아파트 숲에서만 살던 나에겐 그 풍경이 매일 감탄이었다. 오늘의 하늘은 아주 파래서, 오늘의 하늘은 잔뜩 우중충해서, 오늘의 구름은 고양이 꼬리 같아서, 오늘의 구름은 말 그대로 ‘뭉게’해서.

집 바로 앞의 공원 역시 새로운 세상이었다. 오리와 기러기들이 가득했던 공원 호수는 한겨울이 되자 꽝꽝 얼어붙었다. 남편과 나는 손을 꼭 잡은 채 호수 위를 아슬아슬 건너기도 했다. 청설모들은 겨울잠도 자지 않고 눈 속을, 헐벗은 나뭇가지 사이를 뛰어다녔다. 집에서 조금만 가면, 바다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큰 강이 있었고 거기에선 가끔 고래가 출몰한다고 했다. 바다도 아닌 강에서 말이다. 나는 그곳에 갈 때면 늘 고래를 상상했다. 저기 바다가 아닌 강에서 헤엄치고 있을 고래를.


몬트리올에서 오래 살고 싶었지만 코로나가 발목을 잡았다. 남편의 특수 비자는 국경 봉쇄와 함께 연장이 불가해졌다.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지, 좀 더 버텨봐야 할지 고민하던 중에 밴쿠버의 회사에서 연락이 왔다. 몬트리올로 온 지 1년째 되던 날, 나와 남편 그리고 내 두 고양이는 다섯 시간의 비행을 하여 다시 낯선 곳에 도착했다.

그게 지금 여기, 밴쿠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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