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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살이 24일 차 - 마음의 날씨

by 천백십일

새벽부터 제법 많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일기예보에서 비가 내리고 나면 기온이 많이 떨어진다고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집안 공기가 더 썰렁해진 것 같았고 창가나 외벽 쪽으로 가면 더욱 한기가 느껴졌다.


한국인들이 두꺼운 패딩 점퍼를 입는 모습이 이상하다는 외국인의 인터뷰를 본 적이 있다. 등골브레이커라는 신조어를 만들 정도로 고가의 패딩 점퍼 유행이 시작된 지도 10~20년은 훌쩍 넘은 것 같다. 하지만 겨울에 패딩을 입으면서도 그렇게 고가의 기능성 제품이 필요한지 의문이었다.

그런데 대만에서 3주 넘게 지내다 보니 그런 의문이 사라지게 됐다. 이곳에서는 기온이 16~7도에도 패딩을 꺼내야 하고 길거리에서 입고 다니는 사람을 볼 수 있다. 대만 사람들 입장에선 평균 30도가 넘는 기온에서 15도 정도 떨어진 상황이니 패딩을 입어야 할 정도로 추워진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여름엔 30도가 넘는 기온에서 살다가 겨울이면 영하 기온으로 내려가는, 일 년 사이에 기온이 40도가 왔다 갔다 하는 한국에선 기능성 패딩이 충분히 필요한 아이템이란 생각이 들었다.

날씨는 춥지만 집안에 있는 것이 답답하여 대만고궁박물원으로 갔다. 보통 대중교통으로 이동하는 편이지만, 오늘은 날씨로 인해 우버를 이용했다. 대만 길거리를 다니다 보면 우버 광고를 종종 볼 수 있어서 써봐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실제 사용해 보니 우버에서 주는 각종 프로모션을 이용하여 조금이라도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었다. 편안하게 고궁박물원에 도착해 보니(우버 내리며 일회용 우산을 잃어버린 것은 비밀이다.) 좋지 않은 날씨에도 중국 역사를 볼 수 있는 다양한 유물을 만나기 위해 많은 관람객이 있었다.


대만고궁박물원에서 가장 유명한 유물은 옥으로 만든 배추 모양의 취옥백채(翠玉白菜)와 동파육 또는 삼겹살 모양의 돌 육형석(肉形石) 등이 있는데, 아쉽게도 둘 다 볼 수 없었다. 취옥백채와 육형석의 경우 대만 자이현에 새로 만들어진 고궁박물원 남원과 이곳 타이베이 고궁박물원 두 곳을 약 6개월 단위로 교차 전시를 한다고 한다. 지금 시기에는 취옥백채가 남원으로 가있는 시기라는 것은 알아둔 상황이라, 대신 육형석은 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가보니 육형석 또한 타이난에 있는 미술관의 기획전시에 참여하고 있다고 한다.

고궁박물원에는 귀중한 유물이 70만 점이나 모여 있다고 하며 그 하나하나가 귀중한 것임을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이름이 알려진 유물을 볼 수 없다는 점에서 실망감이 컸다. 아이 역시 오기 전 책을 통해서 보았던 두 유물을 하나도 볼 수 없어서인지 고궁박물원 관람에 큰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흥미가 없다 보니 자연스레 박물관 일층만 봤을 뿐인데 아이가 힘들다고 푸념이다.

박물관 오기 전, 박물관 해설투어를 할까 말까 고민을 많이 했었다. 이왕 가는 김에 해설을 통해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에 대한 설명을 잘 듣고 오자 싶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취옥백채와 육형석이 전시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그러면 굳이 필요할까?' 싶은 마음이 들었고, 단체로 이동하면 더 힘들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신청하지 않았다.

하지만 막상 박물관에 들어가니 짧은 영어 실력과 번역기를 활용하며 유물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는 것에 한계가 있었다. 그러다 보니 아이는 더욱 집중력이 떨어졌고, 정작 가장 신나 하던 때는 관람을 마치고 1층 카페에서 산 펑리수 2개를 먹고 난 뒤였다. 이래저래 아쉽지만 다음에 다시 오기로 약속하고 고궁박물원을 떠났다.

고궁박물원 근처에 위치한 MRT 역 중 jiantan역이 있다. 이 역 근처에 쇼핑몰이 있는데 그 위에 미라이 관람차가 있다. 건물 옥상에 거대한 관람차가 있는 것이다. 여기는 10년 전 아내와 여행을 왔을 때도 와봤던 곳으로, 그땐 고궁박물원을 가지 않고 이 관람차를 타기 위해 시내와 동떨어진 이곳까지 왔었다. 당시 생각보다 높아서 무서워하며 관람차를 탔던 기억이 남아 있지만, 시간이 지나며 기억이 미화된 탓에 다시 한번 도전해 봤다.


쇼핑몰에서 식사를 하고 비장하게 옥상으로 올라가 관람차 앞에 섰다. 역시나 크기도 크고 날씨가 흐리고 바람이 불어서인지 '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다 오늘따라 이용객도 우리 말곤 여학생으로 보이는 무리 한 팀 밖에 없었다. 탈까 말까 고민하다 타기로 결정하고 관람차에 올랐다. 역시나 올라갈수록 왠지 더 무서운 기분이 들었다. 관람차 내부 손잡이를 꼭 잡고 올라가던 중 시내를 바라보니 타이베이 101 빌딩의 야경이 보였다. 그것을 보고 있자니 왠지 모를 친근감과 '이곳에 생활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무서움과 웃음이 버무려진 탑승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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