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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교일기 #12] 우리 아기는 복덩이일까?

임신 14주 차, 예상치 못한 선물

by Sylvan whisper


'분명히 사랑이가 복덩이가 될 거야'


가장 친한 친구에게 우리의 임신 소식을 알렸던 날, 그 친구가 먼저 해준 말이었다. 이후 친구는 자신이 부모가 된 뒤 알게 된 여러 현실적인 조언들을 덧붙였다. 출산가정에 제공되는 정부지원이나 세금 감면 혜택, 부모수당 등 이미 알고 있던 내용도 있었지만, 처음 듣는 이야기들도 많았기에 퍽 흥미롭게 들었더랬다.

이날, 이 '혜택'들에 대한 대화는 우리가 나눈 이야기들 중에서 아주 작은 비중을 차지했다. 임신을 했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에 나눠야 할 대화는 이것 말고도 차고 넘쳤기 때문이었다. 우리의 아이가 '복덩이'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한 주제는 이날 우리의 수많은 대화를 열었던 어떤 애피타이저 같은 느낌이었다. 우리가 주로 나누었던 대화는 임신기간 동안 어떻게 지내야 할지, 아이가 태어나면 어떻게 키워야 할지 등이었다. 아마도 우리 부부에게 당장 피부로 와닿을 어려움들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애피타이저는 '복덩이'라는 단어 하나만큼은 내 뇌리에 남겨두었다.




우리 아가가 복덩이가 될까?라는 이 문장은 약간은 흐릿한 기억이 되었다. 내가 끄집어내지 않으면 생각나지 않는 단어로 남아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 것이다. 그러다 약 2개월 정도의 시간이 지나고, 나는 의도치 않게 한라산 등반을 하게 되었다. 한라산을 간다고 하면 주변 사람들도 '아내가 이제 막 임신했는데?'라는 의문을 갖도록 하기에 충분한 일이었다.


'갑자기 제주도까지 그렇게 높은 산으로 등산을 간다고?'


한라산에 가게 된 전말은 사실, 생일을 맞이한 친누나가 한라산 정산 등반이라는 도전을 지원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도전은 생에 딱 한 번 해보면 충분한 버킷리스트 같은 것이었어서, 등산이나 운동이 서툰 누나가 혼자 가기엔 좀 어려운 일이었다. 해서 누나의 요청도 있었고 아직은 무더운 여름에 가까운 날씨로 인한 부모님의 요청까지 더해져 내가 함께하기로 한 것이다.

나는 그래서 이번 한라산 등산에 어떤 기대감이나 목표의식 같은 건 없었다. 오래전 일이지만 이미 한라산 백록담까지 올라보기도 했고, 당일치기로 계획을 했기에 내겐 그저 운동삼아 다녀오는 이벤트에 불과했다. 사실 등산 자체보다 아내가 홀로 집에 있는 게 외롭진 않을지에 대한 걱정이 더 컸다.




아침 7시 첫 비행기를 타고 우린 제주도에 도착했다. 하필 이날은 내륙 전국에는 비가 내렸다. 제주도 또한 흐린 날씨를 예보하고 있었고, 등산 초입의 산길은 이런 날씨를 과시하기라도 하듯 축축한 공기를 머금고 있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땅의 습기가 운동화 밑창을 스며들 듯 올라왔고,

숨이 점점 짧아지는 만큼 내 생각은 아내 쪽으로 향했다.

나는 철저히 누나의 목표달성 지원이라는 역할을 위해 두 명분의 짐을 지고 한라산을 올랐다. 그 덕에 누나를 직접 밀어 올려 주진 못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에 최대한 집중했다. 등반 페이스를 지속적으로 확인 및 조절하고, 간식과 물의 배분, 그리고 대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주거나 지속적인 파이팅의 말을 건네주는 것 등이었다. 이는 이번 등산에서 나는 '한라산을 오른다'는 느낌이 거의 없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렇게 정상에 100m, 200m씩 점점 가까워지고 우리는 정상 백록담 직전에 마련된 삼각봉 대피소에 도착했다. 나는 이때서야 비로소 '한라산'이라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등산 초반부터 지속적으로 느껴졌던 축축함이 무색하게, 아주 파란 하늘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백록담을 보고 싶다는 기대가 없었기 때문에 나는 '한라산'을 오른다는 느낌도 그다지 없었고, 그저 누나를 돕는 김에 운동이나 하고 오는 일정이었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파랑으로 둘러싸인 한라산에 내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나니, 백록담을 볼 수도 있다는 기대감은 급격히 증폭되었다.


'이거 백록담을 아주 제대로 볼 수 있겠는데?'




예전에 한라산을 왔을 때도 백록담은 아주 짙은 안개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아, 뿌연 광경만을 보다 내려온 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날 우리는 구름 한 점 없는 아주 푸른 하늘 아래서 백록담을 볼 수 있었다.

이날의 정상 직전인 삼각봉 대피소부터의 내 심리상태가 퍽 재미있는 기억으로 남았다. 백록담으로 보이는 한라산의 꼭짓점 부근에 구름이 몰려오는 것이 보였다. 해발고도가 높아진 상태여서 그런지, 바람이 불었던 탓인지 그 구름들은 체감상 꽤나 빠른 속도로 움직였는데, 나는 이 구름들이 보인 이후부터 혹시라도 저 구름이 백록담으로 몰려가기 전에 빨리 올라가야 한다는 조급함이 생겼다. 이 때문에 나는 더 이상 누나의 페이스를 맞춰주며 가기를 포기하고 마지막은 홀로 올라가 버린 것이다.


기대하지도, 바라지도 않았던 푸른 백록담의 광경을 눈에 담을 수 있게 된 것이 감격스러웠는지 나는 장인 장모님께 사진을 찍어 보내드렸다. 그리고 그 사진을 전송하고 난 뒤로 이렇게 덧붙였다.


'사랑이가 정말 복덩이인가 봅니다!'


이날의 내 감정과 그 감격 속에서 '정말로 사랑이가 복덩이인가 보다'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던 것은 흐릿한 기억이었던 우리 아기의 존재이유를 다시 끄집어냈다. 한라산 백록담을 맑은 날씨 아래 볼 수 있는 확률이 얼마인지는 모르지만, '얼마나 희소한 가치를 사랑이 덕에 볼 수 있었느냐'는 사실 중요치 않았다.

내가 일상 속에서의 행복들에 대해서 사랑이를 떠올리게 되었고, 그게 사랑이 덕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사실 만으로 충분하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나는 '우리 아기는 복덩이가 될까?'라는 의문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복덩이라는 존재의 의미는 얼마만큼의 행운을 가져다주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내 삶의 행복을 그 존재에 투영시킬 수 있게 된다는 사실이다.


'내 행복과 행운에 너를 떠올리게 될 거야'라고 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제 나는 누군가를 떠올리며 행복을 정의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한 줄 정보

1. 출산으로 인한 혜택은 정부의 실물 지원 혜택뿐만 아니라, 세금 감면 등 부가적인 혜택들 또한 존재한다.

2. 배우자가 잠시 집을 비우더라도, 정서적 교감과 안심을 주는 메시지를 자주 전하는 것이 중요하다.

3. 아이의 존재를 통해 일상의 순간을 새롭게 인식하는 것은 부모의 정서적 성장으로 이어진다.

4. 행복을 아이에게 투영하는 과정 자체가 부모로서의 첫 태교이며, 삶의 방향을 바꾸는 시작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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