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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 희망 찾기

by 챌린지언 Feb 21. 2025

24년 8월의 어느 날 암 진단을 받았다.

30대의 마지막 여름이었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암 진단을 받은 주인공은 세상이 무너지는듯한 충격을 받던데 나는 이상하리만큼 무감각했다. 아니, 보다는 체념에 가까웠다.

이미 무너진 삶에 또 하나의 무게가 얹힌다고 한들 크게 달라질 것도, 크게 놀랄 것도 없으니 말이다.


그즈음의 나는 수십 년간 쳇바퀴 돌듯 반복되는 우울과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가난에 너무나 지친 나머지 그냥 모든 것을 다 멈추고 쉬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오히려 잘 되었구나.'

마음속 깊은 곳 어딘가에서는 고단하고 척박한 내 삶이 암을 발판 삼아 시시하게 마무리되었으면..

싶기도 했다.


두 눈을 반짝이며 꿈을 이야기하던 사람이 암을 발판 삼아 삶이 끝나기를 바라다니..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을까?


-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의 바람과는 다르게 내 암세포의 크기는 너무 작고 하찮았다.


의사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은 초기에 발견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이냐며 운이 정말 좋았다, 하늘이 도왔다는 말로 축하(?)와 위로를 퍼붓다시피 했지만.. 

글쎄, 나는 그 말에 힘이 나지도, 기쁘지 않았다.


그렇잖아도 고단하고 버거운 삶인데 이겨내야 할 것이 한 가지 더 늘어난 셈이니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것 같아 앞으로 살아갈 날이 그저 막막하기만 할 뿐이었다.


-


천박한 마음을 애써 감추며 암은 별 것 아니라고,

보란 듯이 이겨내 보겠노라 큰소리를 내었지만,

사실은 다 거짓이었다.


돌아보면 나의 삶은 유난히 고되고 피곤한 날의 연속이었다.


21살 겨울 아빠가 세상을 떠난 날부터, 39살 여름 암 진단을 받기 전까지 새벽 4시에 일어나 하루를 시작하고, 밤 11시가 다 돼서야 집으로 돌아왔으니 어쩌면 나의 건강 악화는 이미 예고된 일이었을지 모른다.


작년 여름엔 피곤을 핑계로 일어나지 못해 새벽 수업을 펑크 내고 몇몇의 회원님에게 피해와 실망을 안기는 날도 있었다. (트레이너가 수업 펑크라니.. 이게 무슨...) 


이대로 가다간 밥 못 먹고 잠 줄여가며 힘들게 쌓아온 커리어를 다 망칠 것 같은 불안감에  일요일은 무조건 쉬기로 했지만, 20시간 이상 꼼짝도 하지 않고 종일 잠만 자도 피로는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


지나치게 많아진 생리 양, 은근히 전해져 오는 복부 통증, 기본적인 것들도 해내기 어려운 무력감.. 뒤따라오는 우울감.


그 밖의 모든 증상들이 그저 공황장애와 번아웃 증상인 줄만 알았는데,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암세포가 보내온 신호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좀처럼 벗어나기 힘든 가난의 굴레, 

잊을만하면 찾아오는 공황과 불안, 그리고 번아웃.

엎친데 덮친 격으로 암 투병까지... 


나는 더 이상 나의 삶을 감당해 낼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아니, 감당하고 싶지 않았다.


-


누군가 그러더라.

신은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역경만 준다고.

열정이 많았던 사람일수록 권태를 심하게 겪는다고.

좋아하고 열정적이었던 만큼 번아웃을 겪게 된다고.


열정이 영원하지 않듯, 권태도 영원하지 않으니

다 지나간다고. 그러니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하지만 아프고 힘든 시간은 지겹도록 더디게 흐른다.


"이봐요, 신이라 불리는 양반, 존재한다면 내 얘기 좀 들어보쇼. 나는 이 모든 역경을 감당할 수 있는 그릇이 아니야. 할 만큼 했으니 이제 그만합시다."


-


수술 전 마지막 수업을 마치고 숨이 막힐 정도로 빼곡했던 스케줄표를 텅 비워낸 그날,

나는 마치 허공에 떠 있는 먼지가 된 기분이었다.


일밖에 몰랐던, 일뿐이었던 삶.

공허했던 내 삶을 꽉 채워주었던 일들이 마치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니었다는 듯 순식간에 사라지고, 텅 비어버린 삶을 무엇으로 어떻게 채워나가야 할지 알지 못한 나는, 5평 남짓한 작은 방에 몸을 겨우 뉘일 정도의 최소한의 공간만 남겨두고 온갖 쓰레기들로 가득 채워나가고 있었다.


쓰레기 더미에 파묻혀 흐리멍덩한 눈으로 천장만 바라보던 어느 날, '암만 그래도 살아야지, 살아내야지' 하는 작고 힘없는 소리를 간신히 붙들어 몸을 일으켰다.


아무렇게나 어질러진 방을 정돈하고, 언제 마지막으로 씻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쉰내 나는 몸을 깨끗이 씻으며 우울의 늪에 빠져있던 나를 단정히 해본다.


그래. 이렇게 다시 해보자.

아주 작고 사소한 것부터 차근차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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