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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륜 May 24. 2021

진실을 말하는 용기

다크챕터 DarkChapter / 위니 리


자신의 경험을 어둠 속에서 끌어올려 써낸 위니 리의 자전소설, <다크 챕터>. 


하이킹을 즐기는 지적인 타이완 계 미국여성 비비안과 떠돌이 집안의 비행 청소년 조니, 두 사람은 아일랜드 벨파스트 숲 속에서 성폭력의 피해자와 가해자로 만난다. 그녀에게도 그 해 사월은 잔인했다.


“그 사건이 일어난 순간부터 삶은 전날과 절대로 같을 수 없다.”라고 고백하는 비비안. 


그녀에게는 무엇보다도 어떤 본질로부터 불행이 시작되었는지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필요했다. 대부분 성폭력 사건은 가해자에게 잠재된 악의 실체를 알아내기도 전에 서둘러 처벌을 끝내버리고 피해자인 그녀들을 불행의 진흙탕으로 던져버리니까. 


저자 자신이 성폭력 피해자로서 써 내려간 이 소설 속에서 사건 상황과 재판에 이르는 모든 과정과 묘사들은 “사실 관계에 초점을 맞추세요”라고 그녀에게 충고했던 정신과 의사의 조언을 철저하게 따르고 있다.


“누구도 내가 겪은 일을 모른다”는 피해자의 외로움과 고통의 반대쪽에는, 가해자 소년 속에 자리 잡은 왜곡된 性 인식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지구 저편의 청소년과 이 땅의 갑의 위치에 자리 잡고 권위를 행사하는 일부 남자들의 성 인식은 놀라울 만큼 닮아있다. 


“나중에 반항하거나 빠져나가려 해도 상관없다. 너무 늦었으니까. 원하는 대로 다 할 수 있다. 그 여자들은 경찰에 신고하지 않아. 휴가를 망치고 싶지 않거든.”


자신의 형으로부터 범죄를 전수받고 실천해보는 가해자 소년, 그 속에 숨겨진 뿌리박힌 악의 뿌리는 과연 어디에서 시작된 걸까? 비서를, 제자를, 후배를 성 노리개로 삼았던 이들 또한 비슷한 우월감으로 차있다. “경찰에게 신고해? 너도 즐겼잖아?”왜 우리는 잠재된 惡의 실체들이 숨어서 휘두르는 칼날에 인생을 농락당해야 하는가?


만약 풀리지 않는 이런 질문들 앞에 분노 밖에 답이 없었다면 저자는 이 책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피해자였던 자신이 성폭력 신고 후 경험한 사건 처리의 과정을 정확하고 상세하게 서술하면서 사회의 구조적인 무능력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또한 상황과 증언을 가해자 소년의 시점으로도 세밀하게 묘사하면서 범죄의 뿌리를 이해하고자 노력했다. 


저자 위니 리는 성폭력 사건을 극복하는 길은 고통과 슬픔을 넘어서서 사실을 정확하게 드러내는 의지와 용기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녀의 소설은 성폭력 사건을 수치스럽게 여기며 피해자들의 불행을 쉽게 동정하고 지나쳐버리는 사람들을 부끄럽게 만든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방송매체들은 우리가 얼마나 타인의 불행 앞에 무지한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그녀는 레드 카펫을 밟으며 영화계의 떠오르는 신예 제작자로 스포트라이트를 받던 하버드 출신의 유망주였다. 사건을 신고하고 경찰의 조사를 받고 나온 다음날 아침, 자신을 겁먹은 중국소녀로 둔갑시켜 버린 아일랜드 뉴스를 보며 그녀는 더 큰 상처를 받는다. 


내가 책을 읽는 동안에도, 성폭력 피해자인 그녀들은 인터넷 댓글들 위에서 부당한 난도질을 당하고 있었다. 타인의 삶에 대한 존중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이들, 보이지 않는다고 함부로 쏜 화살들, 겪어보지 않은 일은 나 몰라 하며 뱉어놓는 악플들. 무책임한 모든 말들이 날아다니면서 가해자의 범죄를 희미하게 만들고, 피해자를 쉽게 농락하면서 불행에 무거운 좌절을 더 얹어놓는다.


“몇 년이 지난 지금. 나는 마치 과거의 나를 뒤쫓던 그 사람이 된 것 같다. 나는 너무 늦게 도착한 수호천사처럼 그녀의 발자취를 따라 맴돈다.” 


저자가 사건을 복기하며 후회하는 부분의 글을 읽으며, 나는 가슴이 답답했다. 왜 후회는 피해자의 몫이어야 하는가? 가해자의 참회는 왜 진정한 사과로 피해자에게 돌아오지 않는가?


우리 또한 그 모든 불행의 가능성을 가지고 살아간다. 


“10분만 일찍 그 곳을 지나갔다면, 그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면, 그 때 강하게 거부했다면……”


이런 후회는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다. 우리의 수호천사들이 직무유기한 것이 아니다. 惡의 실체가 모습을 드러낸 순간 넘어졌을 뿐이다. 왜 돌부리를 보지 못했냐는 말을 할 수 있는 자격은 아무에게도 없다. 우리가 하이킹을 떠나는 이유는 숲길을 걸으며 자연 속에서 호흡하기 위해서다. 불행을 예감하고 준비하고 여행을 떠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만약 이 불행이 나의 것이었다면, 나의 딸, 혹은 여동생이었다면……’하는 역지사지의 자세는 방관자로 있는 이들의 태도를 바꿀 뿐만 아니라 또 다른 불행들도 줄일 수 있다. 피해자가 홀로 숨어 고통을 끌어안고 남은 불행의 시간을 살지 않도록, 진실을 알려는 노력은 모두에게 필요하다.


용기 있는 그녀, 위니 리는 지금 우리들에게 말하고 있다. 


이제 더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고. “당신의 잘못이 아닙니다. 모든 것은 가해자와 이 사회의 잘못입니다. 여러분은 사건의 진실을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회복할 수 있습니다.”라고.


진실을 정확하게 말할 때 감춰진 악은 드러나고 숨을 곳을 잃어버린다. 


진실은 피해자들만의 몫이 아니다. 듣는 이의 몫이 더 크다. 그녀가 진실을 밝히기 위해 얼마나 많은 상처를 붙잡고 여기까지 와야 했는지를 귀를 열고 들어야 한다. 무엇보다 뉴스와 미디어가 사실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역할을 책임감 있게 수행해 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피해를 접수하고 관리하는 기관의 성폭력 사건에 대한 의식도 매우 중요하다. 피해자가 사건을 신고하고 조사받는 과정에서 두 번째 상처를 받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성폭행을 당하고 병원으로 온 소설 속 그녀에게 내려진 처방은 편의점에서도 살 수 있는 진통제, 이부프로펜이었다. 우리 사회도 싸구려 반응으로 그들의 불행을 덮어버리는 무지를 부끄러워해야 한다.


피해자와 생존자 그리고 그 사이에 존재하는 우리를 위해, 진실을 말하는 용기로 소설을 써준 작가 위니 리. 그녀에게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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