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원리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은 자연 속에 있는 사물들의 정지와 이동을 일정한 원칙으로 설명해 사물의 통일된 본질을 밝히려는 것이 목적이다. 본성을 연구하는 대상에는 요소로 불리는 물질의 기본 단위와 이 요소로 이루어진 무기물은 물론, 동물과 식물, 인간을 아우르는 생물과 인간이 만든 인공물까지 포함됩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지향한 자연학의 목표를 간단히 말하자면, 사물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물의 본질을 이해하고자 자연의 본질을 밝혀내려 했던 그리스 철학의 전통을 이어받고도 그를 넘어섰다. 이전 철학자들의 사상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그 문제점을 지적해 사물의 본질을 포괄적이며 체계적으로 이해했다. 이것을 종합한 결과는 사물을 구성하는 궁극적인 재료와 사물 변화의 본질 및 원인을 탐구한 것이다. 사물의 본성 중 첫 번째는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가로서의 재료이다. 하지만 이 재료가 신에 의해 창조되었다면, 그것은 과학이 아닌 신화에 불과했다. 재료의 원인을 신으로 보는 관념은 이성적인 추론의 기준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주(또는 세계)가 어느 시점에 생겨난 것이 아니라 원천적으로 존재했다고 보았다. 이 견해는 무에서는 아무것도 생기지 않는다는 그리스 철학의 전통을 이어온 것이다. 이 사상은 탈레스부터 시작해 헤라클레이토스, 아낙사고라스, 데모크리토스 등을 거쳐 점차 정교화되었다. 플라톤 시기에는 우주를 거대한 하나의 유기체로서 파악했고, 데미우르고스가 원재료에 형태를 부여해 세상을 창조했다. 따라서 우주는 목적론적 시각에서 상위의 존재로 간주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주를 유기체로 보되 플라톤과 달리 영구적인 것으로 여겼다. 그의 신은 창조자로서가 아니라 모든 것들을 움직이는 주체로서의 최고 원인이다. 최고 원인으로서 신을 움직이는 다른 원인은 없으므로, 절대로 움직이지 않는 무동력자를 설정함으로써 우주의 영속성을 뒷받침했다. 이처럼 플라톤의 유기론과 목적론을 수용하되, 질료를 근본 원인 중 하나로 고려하므로 우주는 본래부터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선대 철학자들이 자연의 기초 원리를 탐색하려 했지만, 단지 재료(질료)에 관한 원인만을 탐구해 불완전하다고 비판했다. 밀레토스 학파를 중심으로한 자연의 궁극적인 물질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에 대한 비평으로, 사물의 본질을 단지 질료에만 국한해 이해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사물이라는 존재와 그 끊임없는 움직임을 파악해야 하기 때문이다. 변화를 설명할 수 있는 어떤 원리적인 기제가 필요했으므로, 사물 생성의 원리부터 시작해 변화가 끝난 후 완성된 목적론적 원리까지 있어야 했다. 변화를 설명하는 기제가 시작과 끝 사이에 있어야 한다.
우리가 감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사물의 기본적인 특성은 운동 또는 변화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변화를 네 가지 유형으로 분류했다고 보았다. 사물은 실체 자체의 변화, 양적 변화, 질적 변화 그리고 위치의 변화를 통해 변한다. 실체의 생성이나 소멸은 실체 변화이고, 실체가 커지거나 줄어드는 것은 양적 변화이며, 색이나 감각적 능력의 변화는 질적 변화이고, 위치의 변화는 이동을 의미한다. 사물은 이러한 네 가지 범주의 속성을 통해 변화하므로 자연의 본질은 운동과 변화에 있다.
그러나 모든 변화에는 시작, 과정, 그리고 끝이 있다. 각각은 어떤 것에서 시작되는 상태, 변화 과정 속의 상태, 그리고 변화가 완료된 상태를 의미한다. 범주에 따라 네 가지 변화가 발생한다. 변화 과정에서 변화를 일으키는 무언가가 남아야 한다. 그것 없이는 변화가 일어날 수 없으므로 모든 변화에는 어떤 잔존 상태의 것이 있다. 이때 아리스토텔레스는 변화의 시작, 과정, 그리고 끝을 명확히 구별하고자 했다. 변화 이전과 이후는 명백하게 실체이지만, 과정 중에는 어떤 것이 있으므로 이를 기체로 구분했다. 예를 들어 씨앗이 나무로 성장했다면, 씨앗과 나무는 시작과 끝에서의 실체일 것이며 중간 과정의 무언가는 기체라 불린다.
여기서 우리가 평소에 사물이라고 부르는 것은 실체와 기체의 구별 없이 사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실체는 물질과 구조로 구성되며, 이는 질료와 형태로 나뉜다. 이때 질료와 형태는 실체의 물리적 부분이 아니므로 둘을 별개로 간주해야 한다. 이는 실체를 언급할 때 비록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해도, 두 부분을 분리해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실체는 형태가 없는 상태의 질료가 형태를 입혀 형상을 갖추게 되는 것이며, 이는 변화, 추가, 제거 또는 결합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렇게 되면 세상의 모든 변화를 해석할 수 없는 것이 없어진다.
변화 과정을 보다 명확히 설명할 필요가 있다. 변화 과정 중의 기체는 시간과 공간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변화 이전과 이후의 실체는 정지 상태이므로 변화는 오직 그 과정에서만 중요하다. 이전에 간략히 언급한 바와 같이, 아리스토텔레스는 변화 자체를 설명하기 위해 잠재태 또는 가능태 개념을 사용했다. 이때 변화는 잠재태라는 상태에서의 현실태이다. 따라서 가능태와 현실태는 가능성의 소유와 이를 실현한 상태를 의미한다. 가능태는 어떤 현실태가 될 가능성을 가진 상태로, 현실태는 가능태보다 우선한다. 현실태의 존재가 있어야 가능태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어떤 변화에도 원인이 있다. 원인을 제공하는 주체가 있어 의자가 만들어지기도 하고, 나무가 성장하게도 한다. 그러나 이 주장이 항상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벽에 갈색을 칠했다고 해서, 그 벽이 갈색의 잠재태를 가졌다고 보기 어렵다. 색을 칠한 사람의 의지를 갈색 벽의 잠재태라고 하기에는 문제가 여전하다. 물론 그렇게 볼 수도 있지만, 씨앗이 나무로 성장하는 잠재태를 가졌다는 주장과 인과성 측면에서 일치하지 않는 듯하다. 잠재태를 도입하면 거의 모든 것을 이렇게 설명할 수 있지만, 상세한 운동이나 변화의 양상을 세밀히 다루지는 못한다. 그럼에도 거의 모든 운동에 잠재태 개념을 적용하는 것은 상당히 성공적이다. 세계의 모든 변화를 소수의 원리로 해석하고 적어도 그 관점에서 성공을 거둔 아리스토텔레스의 업적은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는 것이다. 오히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는 17세기 말에 제시된 퍼즐 조각들을 정확히 맞춘 뉴턴에 버금가는 중요성을 지닌다. 퍼즐 조각이 제공되었다고 해서 누구나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뉴턴만이 해낼 수 있었던 일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