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마 끝에 매달린 빗방울이 줄지어 떨어진다. 마찰을 일으키며 흩어져 웅덩이에 들어간다. 서너 개의 크고 작은 웅덩이와 그곳에 닿지도 못하고 맨 땅에 처참히 부서지는 존재들. 같은 하늘에서 떨어졌음에도 결말은 이리도 다르다. 애초에 누군가 정해준 걸까, 그저 우연일까. 어느 쪽이든 불공평 한 건 마찬가지고, 땅으로 돌아가는 건 똑같다. 참으로 허무한 생이다.
원은 처마 끝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우리는 버려진 걸까.”
머릿속에 많은 말이 떠올랐지만, 입 밖으로 뱉을 수 있는 건 없었다. 그저 웅덩이만 응시한다. 새롭게 떨어지는 빗방울들이 존재를 망각하는 순간들을.
원은 혼잣말을 계속했다.
“아니지. 우린 스스로 여기에 왔잖아. 근데 이상해. 왜 버려진 기분이지.”
연옥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옥아.”
연옥은 대답도, 원을 보지도 않았다. 볼 수 없었다. 웅덩이에 슬쩍 비치는 뻣뻣한 왼손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우린 그러지 말자.”
연옥은 직감했다. 작별을 고한 거다. 그동안 잠시 미뤄두었던, 할 수 없었던 말을 꺼낸 거다. 노력하면 될 거라는 믿음. 창창한 ‘우리’의 앞 날이란 이제 없다. 연옥은 처음으로 울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눈물이 얼굴을 타고 흐르는 동안에도 울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원이 감싸 안으며 연옥의 팔을 토닥인다. 맨 살에 손이 닿을 때마다 차가운 얼음덩이가 훑는 거 같다. 여행길 내내 원의 왼손은 접촉할 일이 없었다. 그의 배려였다. 마지막 순간에서야 원은 마음 편히 연옥을 안아줄 수 있게 되었다. 연옥은 그런 원의 손을 붙잡고 매만진다.
“많이 울어줘. 그럼 버리지 않는 거야. 우린 버린 적 없는 거야.”
원의 손길이 점점 느려지고 감싸 안은 온기가 서늘해진다. 원은 그렇게 사라지고 있다.
“옥아, 우리를 기억해 줘.”
희뿌연 연기가 바닥을 훑으며 유연하게 헤엄친다. 연옥의 주위를 맴돌다 천천히 빗 속으로 향한다. 발 밑의 웅덩이로, 맨 땅으로, 건물 틈 사이로, 80번 버스로, 고성 바다로, 미시령의 은하수로, 로마의 성전으로, 변덕스러운 신의 입 속으로 돌아간다.
원의 왼손가락에 있던 반지가 나뒹굴며 길었던 침묵을 깨뜨린다. 연옥은 반지를 주워 품 속으로 끌어안는다. 그가 남기고 간 유일한 유산. 그의 지문이 묻어있고, 그의 온기가 묻어있는. 그의 살갗을.
원은 마치 내일 보자 인사하며 돌아서는 듯했다. 꼭 다시 볼 수 있는 사람 같았다. 특히나 그 미소가 너무도 평온해 보였다. 원은 그렇게 작고의 계절과 함께 물러났다.
원의 시신이 모두 사라지고 나서야 온전히 혼자가 된 기분을 느낀다. 원의 손이 닿았던 팔을 어루만진다. 살이 벌겋게 부어올라 있었다. 쓰라린 여름이다.
연옥은 그제야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