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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mplay May 16. 2024

낭만 1 ξ 겨울밤, 어둠 속 맥주

스텔라에서 스텔라 마시기.

현실이 잠들면 감정이 폭주하는 날이 있다. 그날이 그랬다. 홀로 깨어있었고, 겨울달의 마지막 날이었다. 더 의미를 부여하자면 4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 윤년의 2월이었고, 그날은 여분의 하루가 주어진 2월 29일이었다. 평소라면 할까, 말까 고민했을 일을 단번에 저질렀다.


똑똑, 지금 맥주 한 잔 하실 분? 


긍정의 답들이 오가고 제안 10분 만에 옷을 입고 단지 내 쉼터로 향했다. 거기는 어느 동에서 출발해도 가운데쯤 되는 곳에 있다. 사방이 통짜로 짠 창문이고, 둥근 테이블 2개와 벽면에 긴 테이블이 놓인 단층 건물이다. 밤에 본 쉼터는 어둠 속에서 볕색을 띄고 있었다. 섬 같기도 하고, 별처럼 보이기도 했다. 새삼스레 둘러보는데 이웃이 도착했다. 가까이 산다는 건 이럴 때 좋다. 우리는 마음이 식기 전에 만날 수 있는 사이였다.


안으로 들어가니 늦은 시간이라 아무도 없었다. 가끔 통창 밖으로 강아지를 산책시키는 사람들이나 배달 오토바이가 지나갔다. 여러 겹으로 입은 옷을 벗지도 않고 의자 위에 눌러앉았다. 조금 부대꼈지만 신경 쓰지 않고 아무렇게나 앉아있으니 되려 긴장이 풀렸다. 

이렇게 몸만 챙겨 와 뒤늦게 정신을 다듬고 있는데, 이웃이 가방에서 맥주를 꺼낸다. 머쓱해져서 뭔가 부족하면 튀어나갈 생각으로 주머니 속 신용카드를 매만졌다. 하지만 리필이 필요 없을 커다란 맥주와 과자를 보고선 문으로 향하던 발끝을 모았다.


 “잘 먹겠습니다.”


 맥주캔을 따는데 색온도가 낮은 조명 아래에서도 해쓱한 낯빛이 드러났는지 이웃이 묻는다.


 “오늘 힘들었어요? 살도 빠진 것 같은데?”


나는 바람 빠진 풍선처럼 찌푸리며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22개월의 어린 사람은 부쩍 짜증이 늘고 있었다. 그보다 스무 곱절을 더 산 내가 참아야겠지만, 몸이 지치는 건 참아지는 게 아니었다. 울컥, 그 하소연을 하려다 운 좋게 멈춰 섰다. 왠지 야근을 하는 기분이 들어서 일단은 육아 말고 다른 얘기가 하고 싶었다. 어차피 빠질 수 없는 이야기니 시작은 다르게 하고 싶었다.


“저 요새 운동해요.”


우리는 그 운동은 할 만 한지, ‘줌바’가 무슨 뜻인지, ‘줌바는 아줌마와는 전혀 상관없는 라틴어’라는 등의 이야기를 했다. 그러고 있는데 관리자가 와서 난방이 곧 꺼진다고 안내했다. ‘추워지겠네요.’ 하며 서늘한 스텔라 아르투어를 마셨다. 740ml짜리 캔맥주는 처음이었다. 건네주는 마른오징어를 받아 입에 물고, 달콤한 과자 봉지를 뜯었다. 

하루를 2시간 남기고 성사된 육퇴 후 만남이었다. 춥다고 들어가기엔 아쉬웠다. 이런 건 예상하지 못했지만, 뭐 어차피 두툼하게 입었다. 우리는 개의치 않고 이렇게 큰 맥주는 언제 사뒀는지, 집에 가기 전 뒷정리를 잘하고 가야겠다는 등의 말들을 두서없이 주고받았다. 그 와중에 불도 꺼졌다. 


어둠 속 쉼터는 처음이었지만, 사실 ‘좀 분위기 있는데?’라고 생각했다. 어둠에 익숙해지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였다. 창 밖에 선 가로등은 더 빛이 났고, 그 곁의 앙상한 나뭇가지는 바람에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아마도 퍼덕퍼덕. ‘밖은 위험해. 못 나가겠다.’

어둡고 추운 걸 빼면 아쉬울 게 없었다. 그마저도 ‘밤이니 어둡고 겨울이라 추운 거니까.’

쉴 새 없이 돌아가는 긍정회로 덕분에 그곳에 더 머물렀다. 입은 옷은 그대로였는데 취기 때문인지 처음보다 몸도 가벼워진 것 같았다. 현실이 잠들었을 때 깨어있어 누릴 수 있는 감상이었다. 


한 사람이 더 나타나 캔맥주를 땄고, 우리는 사소하지만 따뜻한 질감의 이야기들을 나눴다. 대부분은 집에서 자고 있는 아이들의 이야기였고, 사이사이 우리들의 근황이 섞여 들었다. 어쩌면 하나의 이야기였다. 나를 닮은 어린 사람이 성격마저 닮아 마음 깊이 공감하면서도 고민하는 이야기들이었으므로. 내 안의 어린 꼬마와 지금의 나, 날 닮은 꼬마 사이의 이야기였다.


어둠 속에서 더 예민해진 귀는 두런두런 나누는 말소리를 또렷하게 들어냈다. 가끔 타탁, 테이블에 캔맥주를 내려놓는 소리와 과자를 씹는 소리가 울렸다. 아그삭아그삭. 당장 자리에서 일어날 것처럼 두툼하게 입고 둘러앉아 진득하게 서로의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또렷한 것은 목소리 뿐이라 모든 말의 무게가 똑같이 느껴졌다. 하는 것도, 듣는 것도 부담스럽지 않았다. 그사이 스텔라는 점점 줄어들었다.


어둠에 둘러싸여 한참 있으니 몸도, 기분도 둥실 떠오른다. 밖에서 본 볕색의 쉼터가 떠올랐다. 별이었는데. 슬슬 졸음이 왔다. 


우리는 다 마신 별을 하나씩 품고 집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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