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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건디와 화이트

by 해니 Feb 18. 2025

 엄마 뱃속에서 나왔지만 엄마랑 나는 아주 반대의 캐릭터를 가졌다. 친탁을 한 내 외모부터 성격, 취향까지 이렇게 안 닮을 수도 있구나 싶었다. 이러한 우리의 다름을 색상으로 표현해 보자면 와인 색깔이 떠오르는 ‘버건디’와 눈처럼 하얀 ‘화이트’가 아닐까 싶다.


 엄마의 인상은 꽤나 강렬한 편이었다. 검고 짙은 풍성한 머리칼과 다부진 눈썹, 다소 부리부리해 보이는 진한 눈매와 크지도 작지도 않은 코와 입술이 살짝 너부데데한 얼굴 안에 오밀조밀 자리해 있었다. 귀여운 인상처럼 보일 수 있지만 카리스마가 서려있는 또렷한 두 눈이 곰살맞게 보이지 않도록 무장하고 있었다. 그런 엄마가 주로 고르던 건 저명도, 고채도 계열의 색상이었다. 입술에 바르는 립 제품도 밝고 쨍한 색보다는 한 단계 톤 다운이 된 것을 자주 사용했고, 스카프나 신발 색상도 원색계열은 많지 않았다. 봄이나 여름에 흰색이나 노랑 같은 밝은 색을 입기도 했지만 내 마음속 엄마의 대표 색깔은 버건디였다. 이 색을 좋아한다고 말하기도 했고 갖고 있는 물건들 중에서도 자주 눈에 띄었으니까 말이다.

 

 엄마와 다르게 나는 하얀 피부에 옅게 갈색빛이 도는 머리칼, 그리고 살짝 처진 눈을 가졌다.  쇼핑을 할 때도 외양에 어울리는 밝고 사랑스러운 색감의 제품을 따라갔다. 파스텔톤이나 원색, 흰색 계열이 나의 취향이었다. 그러다 보니 옷을 사러 가서 의견 충돌이 있곤 했다. 으레 그러하듯 엄마는 때가 타도 표가 잘 나지 않는 어두운 색깔의 옷을 사길 바랐고, 나는 세탁에 대한 개념 없이 그저 내 눈에 예쁜 옷을 사고 싶은 10대 소녀였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추천하고 권하고 싶은 건 인간의 본능인가 보다. 엄마는 엄마 취향의 것들을 입어 보길 바랐는데 마음에 들지 않을뿐더러 나를 더 나이 들어 보이게 했다. 그래도 사주는 입장도 고려해서 타협안으로 옷을 고를 때도 있었다. 한 번은 함께 나갔다가 짙은 와인색의 블라우스를 구매한 적이 있었다. 영 내키진 않았지만 떠밀리듯이 샀다는 게 맞을 거다. 피팅룸에서 나온 내 모습을 위아래로 꼼꼼히 살펴본 엄마가 말했다.


“잘 어울리네. 이렇게만 입으면 좀 좋아.”


마뜩잖은 표정을 잠시 숨긴 대가로 흐뭇해하는 엄마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엄마도 내 고집을 반영해 선택을 존중해 준 적이 있었다. 하얀색 겨울 패딩 점퍼를 사는 걸 허락해 주신 것이다. 십중팔구 관리를 못해서 꼬질꼬질해질 것이라며 으름장을 놓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이 허연 거를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래. 그냥 꺼먼 거 사면 좋잖아, 편하고.”

“...... 그래도 하얀 거 입고 싶은데...... 때 타도 상관없으니까 이거 사고 싶어.”


우리는 매장에서 수분 간 무언의 감정 씨름을 했고 결국 엄마는 흰 패딩을 백기처럼 들어주었다. 얼마나 좋았으면 고등학생 시절 겨울 내내 교복처럼 입고 다녔다. 곧 소매가 얼룩덜룩해졌지만 엄마는 잔소리 한 번을 안 했다. 줄기차게 입고 다니던 그 모습이 인상에 깊이 남은 걸까? 아주 오랜 뒤, 뜻밖의 타이밍에 엄마가 하얀 겨울 패딩 이야기를 꺼냈다.

 



 2019년 겨울, 엄마는 호스피스에서 얼마 남지 않은 삶을 보내고 있었다. 가족들과 교대로 엄마를 챙기느라 왔다 갔다 하던 당시 내 외투는 하얀 패딩 점퍼였다. 병실에 도착해 겉옷을 벗으려는데 엄마가 힘없이 웃으며 말했다.


“그 하얀 잠바...... 꼭 같은 거 고등학교 때도 있었는데. 그때 생각난다.”   

“그랬나? 맞네. 그때도 이런 거 입고 있었네.”


엄마가 기억해 준 덕분에 우리는 타임머신을 타고 잠시 그 시절로 돌아간 듯한 기분을 느끼며 미소 지었다. 생의 끝에 다시 만난 십수 년 전 딸의 모습을 보며 숙희 씨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엄마를 보내면서 다음 생에는 꼭 내 딸로 와달라고 말했다. 귀가 열려 있었다면, ‘얘가 되지도 않는 낯 간지러운 얘기를 하네.’라며 가는 와중에 코웃음 쳤을지도 모르겠다. 마법 같은 일이 일어나 정말로 엄마가 내 딸로 온다면, 밝고 예쁜 옷들을 마음껏 입혀주고 싶다. 그러면 엄마는 다른 게 좋다며 투정을 부리겠지? 그리고는 또 옥신각신하고 말이다. 내세라는 것이 진짜 있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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