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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업의 여왕

by 해니 Feb 04. 2025

 엄마는 국세청 공무원이었다. 지금은 다들 못 해서 안달인 공무원직을 동생을 낳으면서 그만두었다. 그 아까운 걸 왜 그만두었냐는 나의 질문에 엄마는 씁쓸하게 대답했다.

“할머니가 두 명은 못하겠다 싶으셨나 보지.”

내가 그렇게 말썽을 부렸던가? 허구한 날 동네를 쏘다니고 이웃집에 가서 밥 잘 얻어먹고 오고 그랬긴 하다만, 내향적인 할머니한테는 버거운 손녀였을 수도 있겠다.

 

 내 기억 속 숙희 씨는 생산적인 사람이었다.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고 늘어지는 일도 없었다. 원치 않은 퇴사로 전업주부가 되었지만 아이 둘을 돌보면서도 늘 일거리를 찾고 돈을 벌어 왔다. 생활정보지를 들여다보고 지인 소개도 받아 여러 가지 부업거리를 집에 가져오곤 했다. 그중 가장 오래된 기억 속에 전자기기 부품 조립하기가 있었다. 국민학생쯤 되었을 때였나, 샛노란 플라스틱 상자에 기묘하게 생긴 장치들이 수북이 쌓여 있는 걸 봤다.


“엄마, 이게 뭐예요?”

“라디오에 들어가는 부품이야. 여기 순서대로 맞춰서 끼우기만 하면 돼. 너도 해볼래?”


조곤조곤 엄마의 설명을 따라 A 다음 B, B 다음 C 부품을 차례로 끼워 하나를 완성했다. 별 것 아닐지 모르지만 어린 마음에 무언가 해냈다는 즐거움이 마음속에 몽글몽글 일었다. 그 뒤로 가끔 엄마 옆에서 몇 개씩 거들어드리곤 했다.


 손재주가 좋았던 엄마는 아동복 매장에서 판매하는 부자재를 만드는 일도 했다. ‘빠자빠’라는 독특한 이름을 가진 작은 매장이었는데 리본장식이 달린 머리띠나 브로치 같은 것들을 만들었다. 진한 핑크빛 보드라운 천을 미싱으로 드르륵 박아 검지 손가락 길이의 직사각형 몸체를 만들면, 원단 뒤집개로 홀랑 뒤집은 뒤 가운데를 눌러줬다. 주름을 예쁘게 잡아 미리 준비해 둔 다른 천으로 휘릭 감싸주고 마무리 바느질 해주면 짠! 귀여운 리본이 완성되었다. 일련의 과정은 마치 SNS에서 숏폼 보는 것처럼 재미있었다. 엄마와는 다르게 손끝이 여물지 못했던 나는 천 뒤집는 것만 조금 거들뿐, 대부분 구경하는데 시간을 썼다.

 


 내가 초등 고학년이 되었을 무렵의 엄마는 은행으로 출퇴근을 했다. 동네 친한 아주머니 몇 분과 파트타임 업무를 다녔는데 보통의 창구 업무가 아닌 훼손된 지폐를 분류하는 일을 했다. 돈다발을 끌러 계수기에 넣고 세다 보면 걸리는 ‘손권’들을 따로 모으고 멀쩡한 지폐는 다시 수량 계산을 해 묶는 일을 했다. 옆 라인에 사는 내 친구의 엄마와 같이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니던 그때의 엄마는 즐거워 보였다. 엄마는 생산적이고 경제적인 일을 추구하는 사람이었다. 큰돈은 아니었지만 집안 경제에 보탬이 되면서 동년배의 사람들과 사회 활동도 할 수 있는 것이 좋았던 것 같다. 정확한 걸 중요하게 여기는 성격 또한 이 알바에 잘 맞았으리라. 국세청을 그만두지 않았다면 꼼꼼하고 명확한 업무 활동으로 꽤나 인정받고 명예퇴직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가끔씩 들었다.

 

 몇 년 뒤 엄마는 고시원 하나를 인수받아 운영을 시작했다. 지인으로부터 해볼 만한 사업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결심을 한 것이다. 어떤 부분에서 마음이 움직였는지는 모르지만, 엄마는 예민하고 꼼꼼하면서도 고민을 그리 오래 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마음이 동하면 화끈하게 ‘해보자’ 하고 움직였다. 반대로 나는 생각이 많고 주저함이 많았다. 돌아가시던 그 해 초의 난 개인사업자를 낼 것인지 아니면 프리랜서 상태를 유지할지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으로 갈팡질팡한 마음을 엄마에게 털어놓았다.


“덜컥 시작했다가 망하면 어떡해요? 아는 게 하나도 없는데.....”

“...... 그럼 그냥 딱 1년만 해보고 아니면 말어.”


‘1년만 해보고 아니면 만다’ 그건 내 선택지에 없던 옵션이었다. 과하게 골똘한 내 마음의 짐을 덜어주는 듯한 가볍고 시원한 제안이었다. 고시원을 인수할 때의 엄마도 ‘아님 말고’의 정신으로 시작했을 것이다. 좌우간 이것도 사업은 사업이었는지라, 이런저런 어렵고 복잡한 일들을 겪은 뒤 손해보지 않는 선에서 정리를 했다.


 어린 시절 내내 엄마가 보여준 ‘일하는 모습’은 나에게 큰 귀감이 되었다. ‘자식은 부모의 거울’이라는 말처럼 나도 엄마의 삶을 비슷하게 흉내 내며 살아가는 듯하다. 가정주부이면서 프리랜서 디자이너이자 일러스트레이터로, 때로는 글 쓰는 사람으로서의 내 모습을 돌이켜보면 숙희 씨의 삶과 잇닿아 보인다. 엄마의 발 끝도 못 따라갈 수준이지만 그래도 나름 생산적인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외주도 꾸준히 하고 사부작거리며 살아가고 있다. 이런 나를 보며 자라고 있는 딸은 훗날 지금을 어떻게 기억할까?  

 하루는 엄마와 이런 대화를 한 적이 있다. 불현듯 나의 노년이 걱정되어 시작한 이야기였다. 


“엄마, 만약에 내가 나중에 벌어 놓은 게 없어서 딸한테 돈 달라고 하며 살게 되면 어떡하지?”

일말의 고민 없이 대답이 돌아왔다.

“나가 죽어야지.”


하하하. 숙희 씨 다운 대답이었다. 그런 허튼 생각하지 말고 열심히 살라는 일침이 담긴 말.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으니 부지런히 일하라는 엄마의 메시지를 항상 가슴에 품고 산다. 보고 싶은 나의 ‘롤모델’이자 ‘부업의 여왕’ 숙희 씨, 열심히 할 테니 지켜봐 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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