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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의 여인

by 해니 Jan 21. 2025
상도동 금잔디 연립. 내가 태어나서 처음 살았던 곳이다. 경이롭게도 이 건물은 아직도 남아있다.상도동 금잔디 연립. 내가 태어나서 처음 살았던 곳이다. 경이롭게도 이 건물은 아직도 남아있다.

 

 1989년 어느 봄날, 엄마와 나 그리고 돌쟁이 남동생은 상도동 금잔디 연립을 떠났다. 18평 남짓되는 공간은 어른 여섯 명과 아이 둘이 살기에는 무리였기 때문이다. 해외 출장 중이던 아빠 대신 가족과 지인의 도움을 받아 이사한 곳은 상계동의 한 주공아파트였다. 엄마 인생의 첫 아파트, 게다가 전에 살던 곳과 같은 평수지만 3명밖에 살지 않는 쾌적한 인구밀도. 엄마의 해방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 모처럼의 자유를 나름의 방식으로 즐기고 싶었다. 여느 때처럼 소파에 앉아 도란도란 옛날이야기를 나누던 중 갑자기 그날의 기분이 떠올랐나 보다. 딸이 다 크면 들려주려고 한 것 마냥 꽁꽁 보따리에 싸둔 듯한 이야기를 꺼냈다. 


“이사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일거야. 아파트에 산다는 자부심 같은 게 있었나 봐. ‘아파트의 여인’이라면 동네에서 이 정도는 입어야지 싶었지. 그래서 엄마가 뭘 꺼내 입고 나갔게?”

“하하, 아파트의 여인이라니, 뭘 입고 나갔는데요?”

“글쎄, ‘탱크톱’을 입었단다. 그 시절에 말이야. 깔깔.”

“엄마가 탱크톱을? 하하하하, 그거 엄청 과감한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말이야. 그땐 기분이 그랬어. ‘아파트에 사는 여자’라면 그런 걸 입어야 한다고 생각했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동네를 돌아다녔다니까.”


브런치 글 이미지 2

 

 어깨를 드러낸 채 의기양양한 걸음으로 단지를 활보하는 엄마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갓 지어진 새하얀 아파트, 깔끔하게 정비된 보도블록 위를 걸어가는 버건디 빛깔의 아담한 여인을 떠올리자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새 집에서의 새로운 출발에 얼마나 기뻤을까. 그나저나 딸내미조차 한 번도 안 입어 본 과감한 의상을 입었다니. 나라면 아무리 기분이 좋아도 입어 볼 엄두도 안 냈을 텐데 말이다. 엄마 뱃속에서 나왔지만 나와 엄마는 정반대이다. 나는 채도가 높고 밝은 파스텔톤 계열을, 엄마는 낮은 채도의 짙은 컬러를 선호했다. 딸은 크고 벙벙한 옷을, 엄마는 핏이 꼭 맞는 단정한 옷을 좋아했다.

 

 애초에 엄마가 그런 스타일의 옷을 갖고 있었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직접 입고 나갔을 정도로 마음이 둥둥 떠있었다는 것 또한 신기했다. 자식의 눈에 엄마는 그저 처음부터 ‘엄마’여서, 젊은 ‘숙희 씨’의 작은 일탈이나 설렘 같은 건 상상할 수가 없었으니까 말이다. 오랜 세월이 흘러서야 이야기를 들려주던 엄마의 마음은 어땠을까? 아련한 눈빛으로 재잘대듯 말하던 엄마의 모습에서 그날 나는 소녀를 보았다. 달뜬 감정이 고스란히 전달되어 내 마음도 두둥실 떠오르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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