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1 테러가 발생하기 불과 한 달 전, 우리는 뉴욕에 사는 큰 외삼촌 댁에 있었다. 외할머니의 생신을 기념하여 작은 외삼촌 식구들까지 모두 함께 단체 여행을 갔기 때문이다. 엄마를 포함해 모두 합쳐 8명이 뉴욕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당시 나는 고등학생이었고 첫 해외여행이었고 아무 생각이 없었다. 뉴욕은 그저 친척이 살고 있는 도시였을 뿐이었다. 어떤 멋진 영화 속 배경으로 등장했는지 또는 여행하려면 얼마나 많은 돈이 드는지에 관해서는 알 수도 없고 관심도 없었다. 사회인이 되어 돈을 벌어보니 알겠더라. 실로 엄청난 여행이었다는 것을.
엄마는 떠나기 전 행선지에 대해 공부를 하고 가는 모범생이었다. ‘알고 가는 만큼 더 깊이 볼 수 있다’가 모토였다. 게다가 엄마는 영화 보는 걸 좋아했다. 그동안 텔레비전과 극장에서만 보아온 뉴욕의 풍경 속을 직접 거닐고 있음에 감격한 듯했다. 잭 니콜슨과 헬렌 헌트가 주연했던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는 그 시절 엄마의 원픽 영화였다.
물론 이 여행은 로맨틱 휴먼 드라마라기보다는 극한 직업 다큐멘터리에 가까웠을 것이다. 어르신을 포함해 8명이 움직인다면 보통 패키지여행을 예상하겠지만 이번엔 완전한 자유여행인 데다 환승도 장거리 비행도 처음, 3주에 가까운 긴 일정도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내내 엄마는 초긴장 상태로 보였다. 그래도 현지에 밝은 큰 외삼촌과 여행 경험이 엄마보다는 더 있을 작은 외삼촌이 함께일 때는 한결 마음이 편해 보였다.
뉴욕 도착 후 열흘간 부지런히 여러 곳을 다녔다. 자유의 여신상도 보고 캐나다로 넘어가 천섬 제도와 나이아가라 폭포도 보았다. 국립이민박물관과 자연사 박물관에도 갔다. 몇몇 장소는 기억에서 사라져서 엄마의 일지를 보고서야 안 곳도 있다. 체력이 약했던 엄마는 우리가 나가 있는 동안 할머니와 집에 머물며 휴식을 취하기도 했다. 2001년에 엄마는 마흔두 살이었다. 내후년이면 나는 그때의 엄마와 동갑이 된다. 마흔 줄에 들어서고 보니 그렇게 여럿을 인솔하며 다닌 엄마가 존경스럽다. 내가 그때의 엄마라면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여행 중반부터는 일 때문에 먼저 작은 외삼촌이 귀국을 하고, 큰 외삼촌도 생업이 있었기에 오롯이 엄마만 믿고 따라다녀야 했다. 체력은 달렸지만 정신력으로 무장한 엄마는 씩씩하게 우리를 인솔했다. 한 번은 큰 외삼촌의 일터인 플러싱으로 모두가 점심을 먹으러 가야 했다. 큰 외삼촌 댁은 맨해튼 북쪽에 위치한 브롱스였는데 도착지까지 가려면 익숙지 않은 메트로를 1번 갈아타고 거의 2시간을 이동해야 했다. 엄마는 꽤나 긴장한 기색이었다. 외할머니와 작은 외숙모, 나를 포함한 아이들 4명을 이끌고 지저분하고 복잡한 뉴욕 메트로에 몸을 실었다. 1호선을 타고 가다 7호선으로 환승하려면 타임스 스퀘어 42번가 역에서 내려야 했다. 안 그래도 사람 많고 복잡한 기차 안에서 온 감각을 곤두세우고 하차 방송을 기다렸다. 내 맞은편에 앉아 있던 엄마의 표정은 비장해 보였다. 지도도 봐야 하고 영어 리스닝도 해야 하고 가족들도 내릴 수 있게 준비시켜야 했으니까 말이다. 나도 도움이 되기 위해 두 귀를 쫑긋 세우고 듣기 평가에 집중했다.
“This is Times Square Forty Second street. Transfer is available to the......”
철컹철컹 열차가 내는 굉음과 사람들의 웅성임 사이에서 간신히 ‘Times Square’란 단어가 들렸다. 엄마가 벌떡 일어났다.
“내리자!”
신속하게 일행을 그러모아 내렸다. 사실 무슨 정신으로 내렸는지 모르겠다. 얼마나 긴장했는지 아직도 그때 그 감각이 생생히 떠오른다. 그렇게 우리는 여차저차 플러싱에 무사히 도착했다. 나중에 이날을 회상하며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네 외삼촌이 자세한 건 알려주지도 않고 무작정 플러싱까지 오라고 해서 얼마나 애먹었는지, 어휴.”
볼멘소리처럼 들렸지만 엄마의 말투에서는 낯선 환경에서 잘 해낸 것에 대한 뿌듯함이 전해졌다. 비록 몸은 작고 약했지만 심지는 굳고 당찬 엄마다웠다.
여정 후반 즈음에 월드 트레이드 센터를 강 건너에 두고 기념 촬영을 했다. 그리고 집에 무탈히 돌아온 지 한 달 좀 안되었을 무렵, 내가 보고 온 건물 두 동이 테러를 당하는 모습을 생중계로 보았다. 다들 혼란스러운 와중에 우리 가족은 난리가 났다. 큰 외삼촌이 건물 소방 시설과 관계된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행여나 저 끔찍한 일에 휘말렸을까 걱정된 엄마와 외가댁 식구들은 큰 외삼촌과 연락이 닿기 위해 무척 애를 썼다. 통신 장애로 인해 바로 연결되지 않던 미국 식구들의 소식을 어렵게 들을 수 있었고 엄마는 안도했다.
우리의 첫 미국 여행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일지를 모은 상자를 정리하던 중 2001년 9월 12일 자 신문을 발견했다. ‘미국이 테러당했다’라고 큼직하게 헤드라인 쳐진 신문을 보관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냥 기분 좋은 추억으로만 남기기에는 너무나 슬프고 안타까운 사건이 뒤따랐던 그때를 엄마는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오래된 신문의 향을 맡으며 헤아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