슥슥 스르륵
사각사각
은반 위 피겨 스케이터의 날처럼 천 위를 누비는 가위질 소리를 가만히 들었다. 엄마는 자기 몸만큼 긴 자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닳고 닳은 자그만 하늘색 초크로 곳곳에 흔적을 남겼다. 잘라 낸 각 부위들을 부라더 미싱기로 드르륵 박고 꼼꼼하게 마무리를 하고 나면 뚝딱 옷 한 벌이 만들어진다. 손 끝이 야물지 못한 나는 엄마가 만드는 모든 것들이 신기했다. 마술 같았다.
실과 바늘이 있으면 엄마는 무엇이든 만들었다. 우리 가족들의 옷과 이불, 커튼이나 테이블보 같은 잡화 그리고 뜨개질까지 두루두루 섭렵했다. 내가 아주 어릴 때는 웨딩드레스와 한복 만드는 걸 배우러 다니기도 했다. 집 한구석에는 항상 부라더 미싱기가 있었고 90년대 홈패션 책이 교본처럼 꽂혀 있었다. 오래된 낡은 스프링 노트에는 빼곡히 가족과 지인들의 신체 치수와 옷의 앞판과 뒤판의 본 형태가 기록되어 있었다. ‘어머니 스웨터’, ‘엄마 조끼’, ‘아무개 잠옷 바지’ 같은 이름들과 함께 말이다.
“엄마, 이런 건 팔아도 되지 않아요?”
“됐어. 어차피 얼마 남지도 않아.”
만듦새도 좋아서 팔 법도 한데 장사는 자신이 없었던 건지 늘 가까운 사람들을 위해서만 미싱을 돌렸다. 어쩌면 이런 소소한 즐거움 자체가 좋았을지도 모르겠다. 뭐든 완성되면 살짝 달뜬 표정으로 ‘짜잔’하며 보여주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아직도 엄마가 만들어 준 여름 잠옷 바지를 잘 입고 있고 겨울에는 오리털 이불 전용 커버를 덮고 잔다. 죽을 때까지 입고 쓸 거다.
엄마는 뜨개질도 참 잘했다. 내 눈에는 아랍어처럼 어렵게 느껴지는 뜨개질 도안을 본인 구미에 맞게 조정을 해가며 목도리도 뜨고 스웨터도 만들고 조끼도 만들었다. 엄마한테 배워보려고 여러 번 도전했지만 도안을 잘 못 보고 빈틈 투성이었던 나는 매번 팽 당했다.
“그냥 하지 마. 실 아깝다.”
뜨개질 고수의 딸이 뜨개질 고자라니. 통탄할 일이로다.
암 발병으로 몸이 아프기 시작한 뒤로는 미싱보다는 뜨개질을 더 많이 했다. 아크릴 수세미가 유행하기 훨씬 전부터 숙희 씨만의 스타일로 수세미를 떴다. 처음에는 일반적인 도안대로 동그란 모양, 종 모양을 떴다. 나중에는 점점 발전해서 꽃, 멍멍이 얼굴, 과일 단면 등등 다양한 디자인을 선보였다. 손녀가 태어난 후에는 뽀로로 모양을 많이 떴다. 내가 만든 걸 손녀가 좋아하니 더욱 뿌듯했던 모양이다. 십시일반 뜬 수세미들은 가족과 친지들에게, 엄마의 지인들을 넘어 내 친구들에게 까지 전파되었다. 반짝이는 재질이 싱크대보다는 크리스마스 트리에 더 잘 어울려 성탄절 장식으로 쓰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엄마 수세미 인터넷에서 팔았다!”
“오오! 누가 샀어요?”
“혹시 누가 관심 있을까 싶어서 82쿡에 5개 5000원에 올렸더니 산다고 댓글이 마구 달리더라고.
그래서 조금 팔았어. 아유 신나.”
엄마의 작은 소일거리가 금전적 가치로 돌아온 것에 대한 기쁨이 전해졌다.
“뭐야, 그럼 한 개 1,000원에 판 거잖아. 너무 싼 거 아니에요? 공임비가 얼만데~”
“수세미를 누가 하나에 2,000원이나 주고 사겠어~ 천 원이 마음 편해.”
엄마는 조금이라도 더 이문을 남기는 것보다는 마음에 부담이 되지 않는 선을 지키는 걸 더 중요시했다. 아크릴 수세미는 점점 시장에서의 비중이 커져서 마트에서 손쉽게 구매할 수 있었다. 심지어 기발한 아이디어를 적용한 형태로 디자인 소품샾에서도 찾아볼 수 있었다. 그런 수세미들을 볼 때면 딸이 무려 디자인과를 나왔는데 내가 배운 걸 활용해 엄마에게 날개를 더 달아 드릴 수 있었지 않나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이었다.
돌아가시기 전, 꺼져가는 듯 누워있는 엄마의 뭉뚝한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 손이 숙희 씨 자신을, 주변의 많은 사람들을 참으로 행복하게 했구나.’ 염마 생의 끝매듭이 지어졌을 때, 한 땀 한 땀 최선을 다했던 양손 안에 직접 뜬 아크릴 수세미 3개를 쥐어주었다. 호스피스 들어오기 직전까지 기운이 조금이라도 있을 때마다 부지런히 뜨던 수세미들이었다. 뽀로로와 멍멍이 두 마리가 가는 길을 외롭지 않게 해 드렸으리라 믿는다.
실과 바늘을 잡는 사람들 손은 다 비슷한 걸까? 바느질로 작품 활동을 하는 친한 언니가 엄마의 손과 꼭 같은 걸 봤다. 오랫동안 단련되어 야물고 뭉툭한 손 끝, 방식은 다르지만 주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한다는 점마저 비슷해서 언니의 개인전을 보며 엄마 생각을 참 많이 했다. 엄마에게 바느질이 있었다면 나에게는 무엇이 있을까?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할까? 나뿐 아니라 내 주변 사람들에게도 전할 수 있는 행복은 어떤 것일까? 그런 고민들을 오래 했다.
그래서 지금의 나는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다. 엄마가 실과 바늘로 우리의 삶을 지어주었듯, 나도 글과 그림으로 따스한 행복을 짓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