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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틀시티

by 해니


“엄마가 딱 한 판만 더 하고 줄게. 기다려~”

“쳇, 알았어.”


놀랍게도 이것은 나와 딸의 대화이다. 우리 집에서 게임을 제일 좋아하는 건 초등학생인 딸도 게임 회사 직원인 남편도 아닌 바로 나다. 종종 중독에 가까울 정도로 빠질 때가 있는데 남편 말로는 그때 내 눈빛은 살짝 돌아있다고 한다.


닌텐도 스위치가 생기고 ‘동물의 숲’을 시작했던 2018년, 하루 일과 중 틈틈이 하는 것도 모자라 밤에 아이를 재우고 몰래 거실로 나오곤 했다. 특정 시간대에 나오는 동물을 잡아 도감을 채우기 위해서였다. 밤 11시부터 아침 8시 전까지만 나오는 보석풍뎅이를 기필코 잡고야 말겠다며 얼마나 열심이었는지. 그 기세로 공부를 했으면 서울대를 갔을 텐데.(그럴 리가) 유치원생이었던 아이는 내가 곁에 없으면 오밤중에도 비척거리며 일어나 거실로 나왔다. 그럴 때면 필살의 모성애를 발휘해 기척을 알아채고는, 헐레벌떡 닌텐도를 끄고 비몽사몽 한 아이를 데려가 다시 재웠다. 그러나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 한번 제대로 들켜 버렸다.


“엄마...... 뭐 해?”

“히익!”


과하게 몰입했던 어느 새벽, 아이는 닌텐도의 세상을 알아버렸다.


평행세계가 있다면 이런 것일까. 30년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지금은 레트로 게임기로 알려진 ‘패미컴’이 우리 집에 생긴 건 내가 국민학교 저학년이었을 때였다. 은은한 미색과 붉은색의 블록처럼 생긴 장난감의 스위치를 누르면 텔레비전에 별세계가 펼쳐졌다. 컨트롤러를 요리조리 만지면 남극의 드넓은 빙판 위를 까만 펭귄이 미끄러지고 점프하면서 장애물을 피했다. 캐릭터가 미로 사이를 다니며 폭탄을 설치해 적들을 터뜨리는 게임도 있었다. 팩 하나에 타이틀이 어찌나 많던지. 나와 동생은 새로운 놀잇감에 금세 매료되었다. 그런데 그것은 어른들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날 밤, 요의를 느끼고 일어난 내 눈에 기묘한 광경이 보였다. 부엌과 안방 사이에는 불투명한 유리가 끼워진 나무 중문이 하나 있었다. 그런데 그 유리 너머로 새파란 빛이 가득한 게 아닌가. 가만히 다가가 문가에 귀를 댔다. 음소거 수준으로 볼륨이 낮았지만 익숙한 소리의 정체를 단박에 알 수 있었다.


‘뿅뿅-삐용-’

“아잇! 아이고. 그렇지!”


잠옷바람으로 나란히 앉아 몰입한 두 사람의 뒷모습이 보였다. 나는 아주 잠시동안 흐린 눈을 하고 바라봤다. 쫄보였던 나는 ‘엄마! 아빠! 뭐 해!’하고 소리치는 대신 조용히 문을 닫고 방으로 돌아갔다. 낮에 우리는 많이 놀게 하지 못하게 하고선 밤에 몰래 놀고 있었다니. 배신감이 몰려왔다. 왁! 하고 소리나 한번 질러볼걸. 두 분의 표정이 볼만했을 텐데 말이다. 한참 후 어른이 되었을 때, 그 당시를 기억하는 고모로부터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다.


“네 엄마랑 아빠가 그때 게임을 하도 해서 안 되겠다 싶었는지 할머니 댁에 오락기를 갖다 놓기까지 했었다니까”

“그 정도였어요? 하하하.”


그런 특단의 결정까지 내려야 했던 엄마아빠 마음을 이제는 다 큰 딸도 이해를 합니다. 네. 아무렴 부모라도 한창 젊고 흥 많은 30대 중반인데 오죽 놀고 싶으셨겠나 싶다.


숙희 씨의 게임 사랑은 한결같았다. 그중 제일 즐겨한 건 ‘배틀시티’였다. 갈색 벽돌 미로로 이루어진 맵의 하단에 위치한 독수리 마크를 적 탱크들로부터 지키는 단순한 게임을 엄마는 무척 그리워했다. 추억의 패미컴은 정리한 지 오래였고, 콘솔형 오락기보다는 컴퓨터의 시대였기에 숙희 씨는 아들에게 온라인에서 배틀시티를 찾아낼 것을 명했다. 얼마 뒤 기똥차게 사이트를 찾은 덕분에 자투리 시간이면 엄마는 동생 컴퓨터 앞에 앉아 놀곤 했다. 삐용 삐용- 대포를 날리면서 종횡무진하던 숙희 씨의 뒷모습은 꽤나 열정적이었다. 50대의 몸에서 30대 숙희 씨의 에너지가 느껴졌다고나 할까.


엄마를 보내드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동생이 자기 방에 남아있던 추억 하나를 전해주었다.


“누나, 내 키보드에 ‘Z’ 키만 닳아 있다. 왜 그렇게?”

“Z? 왜 그런데?”

“엄마가 배틀시티 놀면서 총 쏘느라고 엄청 두드려서.”

“아하하하. 엄마답다 진짜.”


혼신의 힘을 다해 적을 물리치던 숙희 씨의 Z키. 이제는 희미해져 버린 그 흔적을 어루만져보았다.

지금도 저 하늘 어디선가 즐겁게 게임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면서.


‘엄마, 재미있게 잘 지내고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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