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엄마를 해가 잘 들지 않는 봉안담 1층 자리에 모셨다. 보통은 양지바른 곳에 고인을 모시기 마련이지만 생전 엄마는 햇볕을 딱히 좋아하지 않았기에 이 자리도 좋아하겠거니 싶었다. 같은 봉안담에는 엄마보다 훨씬 먼저 온 분도 있고 최근에 온 분도 있었다. 연령대는 다양했다. 전체적인 모양새는 돌아가신 분들이 입주하는 아파트 같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새 집의 주소는 9동 136호였다. 숙희 씨는 새 보금자리에서 좋은 이웃들을 만났을까?
엄마가 마지막 호스피스에 있을 무렵 뉴스에서 코로나에 대한 소식이 조금씩 들려왔다. 잠깐의 해프닝으로 지나갔으면 좋았을 그 소식은 엄마가 떠난 이후 급속도로 늘어나, 급기야 전 세계적으로 큰 문제가 되어 사람들의 삶을 제한하기 시작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딸은 학교 수업을 할 수가 없어 집에서 온라인 수업을 들어야 했고 남편은 재택을 했다. 아내를 잃은 아빠는 외부와 교류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엄마가 사라진 텅 빈 집안에 머물러야 했다. 그때 내가 틈틈이 아빠를 챙겼어야 했는데...... 할 수 있는 전부는 식구들 밥을 챙기며 조용히 지내는 것, 행여 코로나에 걸려 모두에게 민폐가 되지 않는 것 이 두 가지가 전부였던 것 같다.
그렇게 어영부영 미루다가 엄마의 물건을 3년 만에 정리하게 됐다. 보통 고인을 보내고 바로 정리하는 게 좋다고들 하지만, 무슨 미련이 그리 남았는지 친정집에 대해 말을 꺼내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그대로 두면 엄마가 늘 거기 있을 것만 같아서, 엄마가 없는 세상을 부정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차마 정리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하늘에서 지켜보는 숙희 씨는 ‘저 이 씨들, 느려터진 걸 내 핑계를 댄다.’라고 하겠지만. 큭큭.
계속 머물러 있을 수는 없기에 용단을 내린 아빠를 도와 짐을 정리했다. 36년어치의 기록장들과 납작한 뒤통수를 보완하기 위해 완충재를 덧대 만든 모자들이 장롱 한 칸에서 쏟아져 나왔다. 최근까지도 썼던 모자에서는 엄마의 내음새가 났다. 낡은 핸드백들 안에서는 상비용으로 챙긴 휴지와 사탕, 옷핀 따위가 한 움큼씩 나왔다. 서랍에서는 쓰다 만 로션과 립스틱, 머리핀과 모아둔 십 원짜리 동전이 우수수 나왔다. 나는 물건에 잔정을 많이 주는 사람이라서 뭘 잘 버리지를 못하는데, 하물며 엄마의 물건을 버리려 하니 정리에 몇 번씩 브레이크가 걸렸다. 눈앞이 자꾸 흐려지는 통에 빨리 할 수가 없었다.
‘왜 이렇게 빨리 가 가지고 이런 힘든 작업을 하게 만들어요.’
부질없는 원망을 하며 엄마가 남긴 것들을 정리했다. 엄청나게 많은 수세미용 아크릴사와 수예용품들, 기록장들과 내가 써도 될 법한 스카프와 장신구 따위를 가져왔다. 엄마를 추억할 수 있는 물건들이 내 집에 오니 엄마도 같이 온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숙희 씨가 두고 간 건 비단 물건만이 아니었다. 엄마의 말들이 불현듯 일상에서 툭툭 떠오를 때가 많았다. 야채를 썰 때도 ‘그렇게 크게 썰면 안 되지.’라던가, 아스팔트 위 껌 마냥 짓눌린 치약을 정리할 때도 ‘그거 가위로 잘라서 다 긁어 써라.’와 같은, 엄마가 살면서 꿀팁처럼 남긴 말들이 불쑥불쑥 머리에서 떠올랐다. 엄마는 생활 팁뿐만 아니라 인간관계 같은 곤란한 상황이나 모르는 분야에 대해 조언을 잘해주곤 했다. 하지만 더는 물어볼 수 없는 존재가 된지라 ‘엄마라면 어떻게 했을까?’ 혼자 생각하고는 ‘아, 이제 엄마가 없구나.’ 하는 식의 패턴이 한동안 내 머릿속에서 반복되곤 했다.
숙희 씨의 지인들은 엄마가 남긴 수예용품들을 보며 엄마를 그리워했다. 수세미부터 슬리퍼, 인견 잠옷, 테이블보, 커튼 등등...... 한 땀 한 땀 공들여 만든 물건들에는 숙희 씨의 마음이, 숙희 씨와의 추억이 한가득 묻어있었다. 일상에서 흔히 쓰는 물건들이다 보니 애달픈 마음이 더더욱 쉬이 가시질 않았으리라. 그래서일까, 엄마의 지인분들은 나를 보고 싶어 했다. 외모적으로 우리 모녀는 닮은 구석이 없지만, 내 얼굴을 보면 엄마를 만난 듯 반가워했다. 딸로서 엄마를 대신해 위로해 드릴 수 있어서 다행이란 생각을 한다.
코로나로 약 3년을 제대로 애도하지 못했지만 모든 게 정상화가 되면서 우리는 종종 만나 엄마 이야기를 한다. 친정 식구들이 만나 ‘그때 네 엄마가 그랬지.’하며 그리움을 꺼내보고, 엄마의 친구분들을 만나 ‘숙희는 정말 대단한 친구였어.’하며 상실의 슬픔을 달래기도 했다. 그럴 때면 분명 엄마가 이 자리에 함께 있다고 생각한다. 자유로운 몸으로 가 고팠던 나라들 실컷 구경 다니다가도 엄마를 사랑했던 사람들이 모여 오손도손 이야기를 나누면, 잽싸게 날아와 우리랑 시간을 같이 보내고 있을 거라고 말이다.
숙희 씨는 사람을, 그리고 사랑을 남기고 갔다. 엄마가 전해준 따듯한 마음들을 잘 이어가 보려 한다. 나에게 했던 것처럼 나도 내 딸에게, 그리고 내 주변 사람들에게. 숙희 씨가 했던 것처럼 그렇게.
*그동안 ‘숙희 씨, 무슨 생각해요?’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건강과 행복을 빌며,
다음 주에 에필로그로 찾아뵙고 마무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