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추억 안엔 언제나 네가 있다. 우리 인연, 참 오래됐네. 우리는 생각도 비슷해서 금방 친해졌지. 연금이 나오는 안정적인 직업이라는 이유로 공무원을 선택했던 것도 같았어. 우린 그렇게 안정적이고 행복한 미래를 바라보며 공직생활의 애환을 나눴었지. (그러다 어느샌가 입버릇처럼 퇴사를 부르짖긴 했지만 말이야...)
그때 너에게 다하지 못한 말들이 있어.
그때의 난 공무원이라는 직업과 일에 자부심이 없었어. 그래서, 어디 가도 공무원이라 말 못 했지. 사람들이 공무원을 보는 이중적인 시선이 불편했고, 결정적으로 스스로에게 솔직하지 못했던 과거 때문이야.
IMF 시절. 사회엔 각자도생의 차가운 바람이 불었고, 안정적인 게 무엇보다 중요해진 시절이었지. 안정적인 게 최고라고 생각했던 나는 대학시절 단 한 번도 염두에 둔 적 없던 공무원이란 것을 하겠다고 다짐을 했지. 돈과 안정성이라는 현실을 쫓아 대학 4년 내내 꿈꿨던 꿈들을 한순간에 꺾어버린 거지. 누구 탓도 누구 때문도 아냐. 그게 그땐 최선의 선택이었어.
하지만, 그런 일들이 스스로에게 당당하지 못했고 죄책감은 쌓여갔지. 부정적인 감정에 매몰된 탓일까. 언제부턴가 내 몸과 마음, 생활과 삶에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어.
나는 보기보다 예민한 사람인데, 그 예민함이 사회생활에 거슬린다 생각했기에 예민함을 둔함으로 덮어두려고 했어. 거슬리는 상황이 생기면 '아니겠지. 내가 또 예민한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지 말자.' 늘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버릇이 있었어.
부정적인 감정이 생길 때마다 무턱대고 그렇게 덮어버리니 내 안에 분노가 가득 차더라. 아마 내 기분보다 다른 사람 눈치를 본 탓에 내 안에서도 화가 많이 났던 것 같아. 그때의 나는 분노로 가득했고 무기력하기도 했어.
감정이 보내는 신호를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어. 무시하고 덮어두려 했지. 감정이 사회생활에 방해되면 안 된다고 생각했거든. 감정적인 사람이란 평가를 듣고 싶지 않았어. 어떤 상황이든 이성적이고 냉철하게 일하고 싶었어. 인정받고 싶었던 거지. 내 감정보다 다른 사람의 시선과 평가가 더 중요했던 거야.
근데 그러면 그럴수록 직장생활이나 일상생활은 힘이 들었어. 시선은 밖을 향했고 기준은 너무 높았어. 그들에 비해 나는 늘 부족하고 모자란 사람이었어. 아무리 애쓰고 노력하는데도 기준을 충족할 수가 없더라. 항상 불만족.
그러다 보니 나는 온갖 불평을 하는 사람이 됐어. 남 탓, 조직 탓, 환경 탓, 사회 탓, 국가 탓, 지구 탓, 우주 탓. 나는 피해자고 그것들 때문에 내가 이렇게 불행하다 생각했지. 어떻게 하면 좋을지 물어봐도 시원하게 답해주는 사람은 없었어. 그게 인생이라는데 그 말도 잘 이해가 안 되고 오히려 답답하기만 했지.
답이 안 나오니 언제부턴가 내가 나를 엄청나게 공격하고 미워하고 있더라. 남들은 아무렇지 않게 잘 사는데 이렇게 힘든 이유는 내가 못나고 부족해서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었어. 나만 잘하면 되는 건데 왜 못하고 있냐. 노오력 하지 않는 내 탓이다. 결국 나는 나를 엄청나게 미워하고 증오하게 되었지.
그렇게 어디서부터 해결해야 할지 모른 체 그냥 정신없이 바쁘게 살았어. 생각하면 복잡해지니까. 시간은 흘렀고, 직급은 오르고, 성취는 쌓여가고, 생활은 안정되어 갔어. 그럴수록 사람들은 나를 부러워했지. 그런데, 나를 부러워하는 말들이 하나도 공감이 안 됐어.
'난 하나도 행복하지 않은데, 저 사람은 왜 나를 부러워하지?'
그때의 난 겉으로 보기엔 아무 문제없어 보였지만, 속은 분노로 가득 차서 너무나 위험한 상태였지. 엄청난 에너지로 아무렇지 않은 듯 사무실에서 일하다 집에 오면 탈진. 한마디로 껍데기뿐인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