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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msnghwn Jan 13. 2021

Exit

영화 <엑시트>

사는 동안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의 쓸모를 증명해야만 한다. 나는 이런 좋은 직장에 다녀요. 나는 결혼도 했고, 번듯한 아파트에 살고 있어요 같은 허울 좋은 말들을 중얼거리면서.

영화 <엑시트>에 나오는 주인공 용남은 그런 ‘쓸모’가 없는 인간이다. 때문에 영화 속 그 누구도 그의 의사를 존중하지 않는다. 우습게도-정말 영화 같은 상황인-말도 안되는 재난이 터지고 나서야 그는 비로소 쓸모가 생긴다. 그것도 정말 쓸모없을 줄 알았던 산악부 활동 덕에 말이다.

우리는 때로 사람의 쓸모가 사실 존재 그 자체에 있다는 것을, 목숨을 위협받고 나서야 비로소 깨닫곤 한다. 사람은 성장하면서 수많은 잣대로 사회적 쓸모를 평가받는다. 이러한 문화는-혹은 풍습은-잔인하지만, 지금껏 공동체를 유지해온 암묵적 구조이며 동시에 사회 발전의 구심점이기도 하다. 다만 어디까지나 사회 전체-혹은 소수의 기득권 세력-의 관점에서나 그렇다.

개개인의 입장에서 사회적 쓸모는, 자아라든지 영혼이라든지 하는 온전한 나의 것들을 등지게 하곤 한다. 적정한 시기에 맞추어, 최소한의 사회적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강박이 대개 그러하다.


사실 사람이 존재하지 않고서는 쓸모는 논할 수조차 없다. 시기를 달리한다고 해서, 사회가 바라는 역할을 거부한다고 해서 구제불능의 무언가처럼 여겨져선 안 될 것이다. 당연해보이지만 이러한 사실을 간과하는 데서 고름이 터져나오곤 한다. 그러한 논리는 자칫 쓸모없는 인간은 존재할 필요가 없다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다시 영화 <엑시트>로 돌아가 보자.


용남의 아버지가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온 용남을 마주했을 때 처음 내뱉은 말은, 영화 내 반복된 꾸지람과 호통-이른바 쓸모없는 놈으로 귀결되던-이 아니라 그냥 “고맙습니다”였다. 존재보다 쓸모가 앞서는 망할 세계에서 ‘exit’하는 유일한 방법은 결국 신뢰와 사랑이었던 셈이다. 이 사람이 없는 것이 절대로 정당화되서는 안 된다고, 쓸모와는 관계없이 부르짖어줄. 논리가 안 통하면 일견 생떼라도 써줄.


이를테면 가족. 이를테면 친구. 이를테면 연인. 그리고 어쩌면 자기 자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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