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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무 Mar 27. 2024

거울 속의 여인

수영하는 삶 chapter 6


muse

1. (작가화가 등에게 영감을 주는) 뮤즈 (=inspiration)

2. 뮤즈(고대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시, 음악 및 다른 예술 분야를 관장하는 아홉 여신들 중의 하나)



미국 화가 '에드워드 호퍼'에 관한 책을 읽다가 한 그림에서 멈추었다. 나체의 여자가 방안에 서 있고 창가 쪽에서 들어오는 햇살을 온몸으로 받고 있다. 한 손에 든 담배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자유로움, 꼿꼿한 자세에서 당당함, 왠지 모를 어두움까지 뒤섞여 있는 그 그림을 참 좋아했다. <햇빛 속의 여인(A Woman in the Sun)>이란 제목마저. 비혼으로 살겠다며 40대 초반을 보내던 그 시절 내게 한 컷의 희망처럼, 기대고 싶은 이정표처럼 다가왔다.


작년 초여름 서울에서 그의 전시가 있었고 <햇빛 속의 여인>을 직접 보게 되었을 때 그 감흥은 예전과는 달라져 버렸다. 나는 결혼을 해 버렸고, 그림 속 그녀 또한 호퍼의 아내였다는 걸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조세핀 호퍼 역시 그림을 그렸었으나, 남편이 화가로 입문하여 제대로 성공하기까지 모든 뒷바라지를 했다. 부부 사이 일은 그들만의 일이겠지만, 예민한 남편으로부터 폭력을 당한 기록까지 있다고 한다.  


조세핀의 육체와 시간이 에드워드 호퍼의 캔버스 앞에 서 있었듯, 위대한 남성 작가의 스토리에는 '뮤즈'라는 이름으로 여러 여성들이 등장하곤 한다. 짝사랑, 거리의 여인, 배우자, 몇 번의 바람이나 재혼으로 또 다른 인물 등 그녀들의 이미지는 또 그림으로 고스란히 남기도 한다. 욕망의 대상, 종속되거나 가려진 존재, 양육과 희생을 강요당하는 타자화된 여성.



오후 2시, 오전 9시 타임의 수영 강습을 다니면서 무수히 많은 여성들을 벌거벗고 수영장에서 만난다. 진한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어도 대부분은 누군가의 아내로, 엄마로, 딸로, 며느리로 살아낸 세월을 삼키고 있을 터. 그들이 밖에서 어떤 인생을 살았든 상관없이 이곳 물속에서는 오직 나 자신으로 존재한다. 얼굴이 벌게지도록 발을 차고 팔을 돌리고 헉헉거리면서 지금 이 순간 나로 살아있음을 느낀다.    


락커룸에서 머리를 말리고 로션을 바르는 거울 속 여러 명의 나를 본다. 아직 엄마 손길을 필요로 하는 어린아이부터 씩씩하게 친구와 수다 떠는 소녀, 말갛게 빛나는 20대, 백발의 긴 머리를 비녀로 올리는 할머니까지. 내가 거쳐왔거나 걸어가야 할 길 위의 뮤즈들이 모두 거기 당당하게 서 있다.


아름답고, 아름답다.      




매주 수요일&일요일에 헤엄쳐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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