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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민 Nov 24. 2023

오래된 빈집, 새로운 빈집


작은 스케치북 하나를 챙기고 오래된 거리를 걷는다. 그때마다 늘 두 가지의 감정이 겹친다. 특히 건축가의 입장이고 보면, 지금 눈앞의 건축과 사진으로 남은 건축은 어쩔 수 없이 비교 대상이 된다. 하나의 건물에서 영역이 확대되면, 그 자리에 존재했던 서너 개의 건물군과 나아가 거리까지를 포함하는 좀 더 큰 영역에 이르기까지. 마침내 시간의 강을 건너게 된다.


저 멀리서 젊은이들이 삼삼오오 오래된 건물들을 둘러보면서 걸어온다. 유년 시절에 이 거리를 걸어본 나로서는 오래된 거리에 대한 생각이 깊어지게 마련이지만, 이 도시에 더 오래 살아갈 세대들에게는 그 실존했던 것들과 기록은 어떤 의미를 지닐까 궁금하다. 마치 큰 범선을 타고 신대륙에 올랐던 아메리칸들처럼 과거의 일은 깡그리 잊어버려도 무방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들의 시대가 되면, 부산광역시 무슨 구, 무슨 동이니 하는 태어나고 자란 지리적 위치가 정신적 뿌리가 될까?


그러므로 나는 집과 거리의 보존 문제가 아니라, 그런 정신적인 것들의 소멸 시한이 더 절실해 보인다. 새것에 밀려나는 헌것의 비애라기보다는, 그 시점을 경계로 단절될 흐름과 맥의 끊김이 더 두렵다는 말이다.


내가 이 거리를 자주 거닐며 생각에 잠기는 것은, 힘겹게 견뎌온, 오래된 건물의 존재가 주는 고증적 관점뿐만이 아니다. 그 지역에 스며든 짙은 삶의 냄새 때문이다. 나는 그것이 거리와 도시의 맥락이며, 그 흐름이 없는 도시는 죽은 도시라 생각한다. 저 젊은이들은 어떤 냄새를 자신의 기억 창고에 넣어두려는 것일까?

 

그러다 문득 의문에 사로잡혔다. 어느 집의 대문 쪽에다 귀를 대어보고, 문틈으로 안을 살피기도 하고, 흘러나오는 냄새를 맡아 보기도 한다. “저 집에는 사람이 살고 있을까?” 혹시 저 젊은이들과 나는 죽은 거리를 걷고 있었던 것이 아닌지? 당황하는 내 모습을 길고양이들이 담장 위에서 내려다본다.

‘빈집’이란 ‘1년 이상 아무도 거주하지 않거나 사용하지 않는 주택’을 말한다. 정부가 취합 한 전국의 법적 빈집 규모가 지난해 13만 호를 넘었다 하니 지금은 훨씬 더 늘었을 것이다. 원도심에서 집이 비어가는 일이 허다해졌다.


비어있는 새집을 본다는 것 또한 가슴 아픈 일이다. 나는 불행하게도 수없이 많은 빈집을 보면서 매일 출퇴근을 한다. 몇 해 전까지 집의 필요와 때를 맞추어 호황을 누리기 시작하면서 건설업은 국가의 기간산업이 되었다. 하지만 집의 양이 불어나면서 건설 경기는 둔화하고 휴면기에 접어든 것이다.

휴면기가 깊어지면서 최후의 단말마 같은 움직임이 있는데, 지금의 우리나라가 그와 같지 않을까? 수요에 의해서라기보다는 건설업자와 정부에 의해서 주도되는 이른바 ‘경기 활성화 대책’ 같은 것이 간간이 거론되기도 하는데, 선거철을 맞아 벌써 그런 조짐이 보인다.


하지만 틀렸다. 때를 놓쳤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고, 앞날에 대하여 성찰해야 한다. 새집이 빈집이 되어가는 시절을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낡고 오래된 집만이 빈집이 되는 시대가 아니다. 집의 생산은 자제되어야 한다.  


재개발과 도시재생은 양날의 칼과 같은 것이다. 문제는 그것의 조절이 도시의 성패를 좌우한다는 것. 오래된 빈집과 새로운 빈집이 거리를 채워가는 지점에 이 도시가 서 있다. 시민들의 성찰과 당국과 학자들의 지혜가 필요하다. 결국 빈집을 만들지 않으려는 노력이 거리를 살릴 것이다. 그러면 거리에 흐름이 생기고 도시는 맥락을 지닌다. 이른바 명품 도시가 되는 것이다.  


저 젊은이들도 내 나이가 되면, 삶의 냄새가 짙게 밴 오래된 거리를 걷게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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