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리오 영감』, 오노레 드 발자크, 민음사
『고리오 영감』은 1834~1835년 오노레 드 발자크(1799년 5월 20일 ~1850년 8월 18일 )가 발표한 장편소설입니다. 발자크는 '인간 희극' 시리즈를 통해 '사회의 자연사', 즉 '한 시대 전체, 모든 사회 계층과 일생의 경과를 볼 수 있게끔 편성'하고자 했습니다 (위키피디아). '고리오 영감'은 이 '인간 희극' 시리즈 중 1부인 <풍속 연구> 중 첫 번째 part인 <사생활 정경>에 포함되는 작품입니다. 시기적으로도 '인간 희극' 시리즈 중 초창기 작품이기도 합니다.
이런 딱딱한 얘기는 이 정도로 하고, 독자 관점에서 얘기하면 발자크의 소설은 재미있습니다. 배경 설명이 장황하고 문장이 만연체라는 단점(?)이 있습니다만, 흥미로운 이야기를 촘촘하게 끌어가는 솜씨는 발군입니다. 이 '책읽는 자본주의자' 매거진을 시작하게 된 동기가 된 책이 2권인데, 먼저 소개한 '21세기 자본'과 이 '고리오 영감'입니다. 현실적인 교훈이 거의 '리어왕' 급입니다.
『고리오 영감』은 「인간희극」의 중심에 위치하는 작품이다. 다양한 자본주의적 인물군의 관계망 속에서 부르주아 노인의 점진적 쇠락과 귀족 청년의 상승 욕구를 대비해 19세기 프랑스 사회의 벽화를 완성했다.
제가 읽은 '고리오 영감'(민음사)을 번역한 박영근 교수님은 이 작품 해설에 이렇게 적어 놓았습니다. 주의 깊게 볼 문구는 '부르주아 노인의 점진적 쇠락'입니다. 이 작품을 보다 거시적으로, 딱딱하게 요약하면 이렇게 한 줄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이 노인이 부르주아가 되었는지 아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왜' 쇠락하게 되었는지를 아는 것이 이 작품을 이해하는 key입니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자식들 때문입니다.
다른 방에는 고리오 영감이라는 별명을 가진, 이탈리아식 국수와 전분을 만드는 전직 제면업자가 살고 있었다
예순아홉 살쯤 먹은 고리오 영감은 1813년에 사업을 그만두고 보케르 부인 하숙집에 눌러앉았다
소문에 따르면, 아버지 중의 아버지인 이 훌륭한 아버지는 딸자식들을 잘 결혼시켜서 행복하게 해 주려고 각각 오륙십만 프랑씩 주었고 자기는 일 년에 팔천 내지 만 프랑의 연금만을 받았다고 하더군요. 딸들이 항상 딸인 줄 믿고 두 살림을 차리고 두 집을 마련해서 자기를 사랑하고 아껴줄 줄 믿고서 말이에요. 이 년도 안 되어서 사위들은 마치 천한 사람들이 그러듯이 그를 자기들 사회에서 쫓아냈대요.
고리오 영감은 성공한 제면업자로 상당한 부를 쌓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사업을 다 정리하고 파리의 하숙집에서 하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숙으로 거처를 옮기게 된 이유가 좀 어이가 없는 것이, 사위들에게 쫓겨나서입니다. 지참금으로 5~60만 프랑이라는 거금을 딸들에게 주었지만, 돈만 받고 신분이 낮은, 평민인 장인을 쫓아낸 것이지요(어째 리어왕과 상황이 비슷합니다).
이 사위들은 이 지참금마저도 가로채고 딸들에게 주지 않습니다. 그러니 딸들도 돈은 아주 많은데 돈이 하나도 없는, 그런 상황이 되어 버렸고요. 거기다 딸들은 당시 화려했던 파리 사교계에서 명문가 마님 행사를 해야 했기에 돈이 필요했고 그때마다 이 불쌍한 아버지인 고리오 영감은 딸들에게 계속 돈을 대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막판에는 본인의 기물들을 다 팔고 그것도 모자라 본인 연금까지 저당 잡혀서 말이지요. 더 비극적인 것은, 고리오 영감이 죽으면서 이 작품은 마무리가 되는데, 죽는 순간에 자녀들은 아무도 아버지 곁에 없었고, 병원비, 약값 심지어 장례식 비용조차도 없어서 하숙집 사람들이 주머니를 털어서 처리하게 됩니다. 거지들도 자기 장례 비용 정도는 간직하고 다닌다고 하는데, 이 영감님은 정말 대책이 없습니다.
이 아버지는 모든 것을 다 주어버렸어요. 그는 이십 년 동안 그의 오장육부와 그의 사랑을 모두 바쳤고 모든 재산을 하루아침에 바쳐버렸어요. 딸들이 레몬을 꽉 짠 다음에 레몬 껍질을 길 모퉁이에 던져버린 것이나 같아요.
아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배반당한 듯한 그의 사랑은 두 딸에게로 옮아갔다. 그녀들도 처음에는 아버지의 사랑에 전적으로 만족했다.
고리오의 딸에 대한 무분별한 헌신과 시기심 많고 세심한 사랑은 너무도 잘 알려져 있었다
아무리 돈이 많이 들더라도 딸들이 원하면, 이 아버지는 서둘러서 그 소망을 만족시켜 주었다
그런데, 조금 냉정하게 얘기하면, 이 모든 것이 자업자득입니다. 앞뒤 생각하지 않고, 무분별하게 헌신이라는 이름으로 계속 밑 빠진 독에 물을 부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까지 한 이유는 아내가 먼저 죽자 지나치게 딸들에게 집중했기 때문입니다. 딸들이 원하는 것은 앞뒤 안 가리고 다해주고, 그러다 보니 자녀들이 '개념'이 없어진 것이지요. 한마디로 무분별한 자식 사랑이 본인 삶을 비참하게 만든 것입니다.
나는 딸들이 기뻐하기 때문에 살지요.
내 인생, 바로 내 인생은 내 두 딸에게 달려 있소. 그 애들이 행복하다면, 내 새끼들이 우아하게 옷을 입는다면, 그 애들이 융단 위를 걸어 다니기만 한다면, 내가 무슨 옷을 입건 내가 누운 곳이 어디이건 무슨 상관이 있겠소?
자녀가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무언가를 이루고 뿌듯해하는 모습을 보는 것만큼 부모 입장에서 보람 있는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게 정도가 있습니다. 내 인생은 나에게 달려 있는 것이지, 자녀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이들의 기쁨이 부모의 기쁨이 되기도 하지만, 부모 고유의 기쁨도 그에 못지않게 의미가 있고 중요하다고 부모가 먼저 깨닫고 가르쳐야 합니다.
여기서 약간 이기적인 마인드도 필요합니다. 엄마 아빠도 나름의 인생이 있다고 자녀에게 선언하고 교육하며, 상한선을 그어놓고 헌신하는 것입니다. 엄마 아빠의 옷과 누울 곳도 너희 옷과 누울 곳만큼 중요하다고 선언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부모가 서로 합의하지 않고, 자녀를 지속적으로 교육하지 않으면 고리오 영감 같은 상황까지는 아니어도 꽤 가슴 아픈 일이 벌어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저를 포함해서 많은 부모들이 자녀 일이라면 물불 안 가리고 '헌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부모의 사랑을 당연하게 여기는 자녀들도 일부 있는 것 같고요. 입시기간 동안 물심양면으로 열심히 지원했는데 막상 '엄마 아빠가 나한테 해준 게 뭐야?'라는 소리를 듣고 속상해하는 부모들도 종종 보게 됩니다. '좋은 의도가 항상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라는 명제를 증명해주는 좋은 사례, 씁쓸한 사례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저도 평범한 아빠로 자식 키우는지라, '물불 안 가리지 않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아! 내가 만일 부자였고, 재산을 거머쥐고 있었고, 그것을 자식들에게 주지 않았다면, 딸년들은 여기에 와 있을 테지」
「내가 딸애들을 지나치게 사랑했기 때문에 그 애들은 나를 사랑하지 못했어」
고리오 영감님도 결국 본인의 문제를 깨닫습니다. 재산을 가지고 있었어야 했고, 그래서 자녀들을 의지할 상황을 만들지 않았어야 했습니다. 딸들을 사랑하되 지나치게 사랑하지 않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가장 빨라도 늘 느린 것이 후회라고 했던가요? 결국 본인 장례비용조차 자녀들이 아닌 남들이 처리해줘야 하는 상황까지 갔으니 말입니다.「불쌍한 내 새끼들!」하다가 본인 인생이 가장 불쌍해진 것입니다.
글을 쓰다 보니 리어왕과 비슷한 전개로 가는 것 같습니다만, 실제로 두 작품을 읽어 보면 결이 완전히 다릅니다. 비슷한 전개이나 전혀 다른 교훈과 감동을 주는 것, 고전의 힘이 아닌가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