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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벨 Oct 24. 2024

순간

4부

뽀드득.

제법 소복하게 쌓여 있는 눈을 밟으니 삶에선 가질 수 없는 자연의 소리가 들렸다. 지선은 자신과 함께 했던 이들을 기억하고 싶을 때. 어느 순간이라도 있었을 그것을 찾았다.


떨어지는 빗방울이 우산에 닿았을 때 들리는 소리

빨대에 입을 대고 후 불었을 때 보글거리는 소리

바삭 마른 나뭇잎을 밟았을 때 부서지는 소리


시대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을 소리들. 지난 시간을 살았던 이들과 같은 순간을 공유할 수 있는 순간이다. 그들을 기억하는 건 사진도 추억도 아니었다. 그들이 살았을 때 느꼈던 감정을 지선도 느껴보는 것이었다. 지나버린 누군가와 지선의 삶이 유일하게 닿을 순간이다.


눈소리를 마음껏 밟고 싶은 날이면 무릎아래까지 오는 기다란 장화를 꺼내 신었다.

  -알다가도 모르겠어. 표정도 없는 당신이 애들처럼 눈 밟으러 나가고. 비 오는 소리를 좋아하고. 감수성이 풍부한 것 같다가도 입을 꾹 닫을 땐 또 아니니.


어린 지선이 할머니가 오신다던 열흘을 기다리며, 아버지가 일하시러 나가고 사나흘만에 혹은 일주일 만에 집에 돌아오시는 것을 기다리던 때에 깨달았다. 언제까지 온다면 기다리는 것은 쉬운데. 한 번도 언제까지라고 또는 온다고 말해주지 않아 그 말이 주는 기대감을 잊어버리고 살다가 어느덧 자연스레 찾아와 있는 것이 더 반가웠다. 내겐 그렇게 후드득 떨어지는 빗방울이 밤새 소복하게 쌓여 있다가 문을 열었을 때 새하얀 세상을 만들어준 눈이 그랬다. 할머니가 찾아오면 이런 기분일지 생각해 보며. 그들과 같은 시간을 공유한 사람이 되어 그제야 행복했다.


  -엄마, 공부방 선생님이 오늘은 좀 슬픈 날이라고 하셨어. 강아지가 무지개다리를 건넜다고 했거든.

공부방에 다녀온 현이는 축 처진 어깨로 집안을 들어섰다.

  -그래서 현이도 기분이 별로 좋지 않구나.

  -선생님이 그러셨는데. 생명이 있는 모든 것엔 죽음이 있대. 그 죽음이라는 단어가 좀 슬펐어.

죽음이라는 단어를 현이 입에서 듣는 것이 조금 이상했다. 어린아이가 담기엔 조금 무거워 보였기 때문이다.

  -너무 갑자기잖아. 갑자기 내 옆에서 사라지는 거잖아. 그게 너무 슬픈 일이 되는 거 같아.

단어 하나에 작고 연약한 아이가 감당할 수 없는 무게를 짊어진 것 같았다. 바라보는 지선마저 무거웠다. 대신할 수 없는 아이의 짐을 바라보며 지선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엄마의 눈을 빤히 바라보던 현이가 자신이 끌고 온 말의 무게를 느끼고 있는 엄마를 꼭 안아주었다.


소리 소문 없이 갑작스레 찾아오는 것들이 있다. 쨍한 하늘에 후드득 떨어지는 소낙비는 준비 없는 내게 날벼락과 같은 일이다. 준비되어 있지 않은 상황을 갑작스럽다고 말한다. 아랫집 사람이 내 집 앞에 찾아와도 갑작스럽다. 예상치 못한 일들이 벌어지는 갑작스러운 상황. 그러한 일들이다. 죽음은.


지선에겐 갑자기는 아니었다. 기한이 있다는 것은 조금 더 나은 죽음이라고 생각했다.


어디로든 떠났을 테지만. 정해진 독일행 비행기표는 지체할 시간도 없이 떠날 수 있게 도와줬다. 예전부터 준비되었던 계획처럼 모든 것이 흐르듯 진행되었다. 정확히 일주일 뒤, 독일로 가는 비행기에 탔다. 우리 가족은 아들 현이를 가운데 두고 비행기에 착석했다. 땅을 구르던 비행기는 이내 하늘을 오르더니 넓고 희뿌연 구름 속을 날았다. 창문을 매웠던 구름이 점차 사라지고 맑은 하늘이 보였다. 높이 떠오른 비행기는 우리가 제일 높이 오를 수 있는 하늘이었다.


구름 속을 거닐던 비행기가 하늘 꼭대기에 오르는 모습에 현이가 신기한지 감탄을 하며 바라보았다. 지선과 도현은 신혼여행으로 비행기를 타본 적 있지만 현이가 비행기를 타는 것은 처음이었다. 트렁크에 이것저것 넣을 때부터 신이 났던 현이는 설레는 마음을 온몸으로 표현하더니 기내식으로 제공되는 파스타를 바닥에 쏟는 실수를 했다.


  -내가 이럴 줄 알고. 조심하라고 했는데. 끝까지 아빠말 안 듣더니. 나참.

안 그래도 속상한데 아빠가 던진 말이 좋았을 리 없는 현이는 입술을 삐쭉이더니 눈물을 글썽거렸다.

  -현아. 조심하면 좋았겠지만 어쩔 수 없잖아. 엄마가 도와줄 테니 현이가 다시 주워볼까?

현이가 미안해하며 파스타를 주워 담았다.

  -실수는 누구나 하는데. 그걸 스스로 되돌려 놓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많지 않아. 책임지고 노력하는 게 중요한 거야. 기억해 현아.


지선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나면 도현과 지선은 소소한 일들을 모조리 꺼내 지선을 기억하려 할 것이다. 불편한 기억이 되지 않기 바랐다. 지선에게 하지 못한 아쉬움과 미안함이 되지 않길 바랐다. 튀지 않고 평범하고 덤덤하게 모든 것이 눈물이 될 그날들을 위해 지선이 할 수 있는 일은 무난한 하루를 남기는 일이었다.


기억 속 아버지는 며칠에 오겠다. 뭘 해주겠다는 기대의 말과 정확한 계획으로 양육하시던 분은 아니었다. 좀 오래 걸린다 싶으면 집에 돌아오셨고. 지선이 필요한 것을 이야기하면 집주인아주머니께 말씀드리라고 했던 분이셨다. 필요한 것을 미리 구매해 주신 적도 없었다. 졸업식 입학식 이런 건 전혀 모르던 분이셨다. 그러던 아버지가 미래를 위해 남겨놓은 것들이 지선은 조금은 의아했다. 미안해서라고 하기엔 그런 말과 그런 생각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래도 아버지인데" 네가 모르는 부분이 있겠지라고 말하는 것은 지선이 제일 싫어하는 말이었다.


아버지가 마지막이 되어 지선과 가족에게 남기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독일에 도착하니 더욱 궁금했다. 게다가 아버지와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도시라 더 그랬다. 한국에서 13시간이 걸려 도착한 독일은 공항에서부터 높다란 천장에 웅장한 분위기를 가진 곳이었다. 공항을 나와 시내로 조금 이동하는 길에 크리스마스를 맞이하는 반짝이는 조명의 노란 불빛이 차가운 공기를 따스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코너를 돌아 나오니 빵 굽는 냄새를 풍기는 작은 베이커리와 크리스마스 장식품을 파는 가게들이 줄지어 있었다. 견교하게 세워진 듯한 뾰족한 건물들 사이를 지나 숙소로 가는 기차에 탔다. 여기서부터 두어 시간 정도 떨어진 작은 시골마을이라고 했다. 온통하얀색으로 뒤덮인 건물들이 천천히 눈앞을 지나더니 독일을 담은 풍경들이 빠르게 펼쳐졌다. 광활한 눈 속을 한없이 지난 기차는 어느덧 목적지를 가리켰고. 새하얀 눈 위에 첫발을 내디뎠다. 아무도 밟지 않았을 눈 밭 위에 발을 꾹꾹 눌러 눈소리를 내었다. 우리의 발소리가 메아리처럼 조금씩 퍼질 때쯤 하늘색 지붕의 아담한 오두막집이 보였다. 그 뒤론 여러 채의 오두막이 같이 있는 것으로 보아선 우리가 묵어야 할 장소 같았다.


  -숲 속 요정이 초대장을 보낸 것 같아.

어린아이 다운 생각으로 풍경을 바라보던 현이는 문을 열고 나오는 털모자를 눌러쓴 노란 머리의 할머니를 보곤 우리에게 속삭였다.

  -요정이네. 할머니 요정.


점점 우리를 향해 다가오는 그녀는 호수같이 맑은 에메랄드 눈을 가진 나이가 지긋한 할머니였다. 주름진 깊은 미소에 인자함을 품은 눈빛은 도시에서 만난 사람들과 다르게 느껴졌다.


  -안녕하세요. 송지선 이름으로 예약 되었을 거예요.

한참을 지선과 가족을 바라보았다.

  -아니. 그럼 송창석이란 이름일수도 있어요.

그녀가 씨익 웃더니 깜빡했다고 하시며 안내해주시겠다고 하셨다. 오느라 고생했다며 우리를 기다렸다고 하셨다. 그녀는 능숙하게 영어를 썼는데. 우리가 눈치를 보자. 자신이 영어를 가르치던 선생님이었다고 말해줬다. 눈 위에 힐긋 보이는 디딤돌을 지나 우리가 묵어야 할 또 다른 오두막집을 소개받았다. 새로운 곳에 도착한 현이가 신이 나서 소리를 지르는 동안 우리는 짐을 풀었다. 싱글침대가 양쪽에 두 개씩 붙어 있는 널따란 방이었다. 캐리어를 벽 쪽에 밀어 넣고 필요한 짐을 조금씩 꺼냈다. 침착하게 하나하나 정리하는 손길이었지만. 지선과 도현의 마음도 설레었다.


도현은 한쪽 벽면을 감추고 있던 새하얀 커튼을 걷었다.


  -우와.

도현과 현이의 감탄사가 이어졌다. 방과 연결된 화장실에 칫솔을 넣어두고 나오면서 도현과 현이의 상기된 목소리를 들었다. 뭘 그리 노랄 일들이 많은 건지. 무심하게 소리가 나는 곳으로 눈길을 돌렸을 때. 자연이 주는 또 한 번의 웅장함에 온몸에 전율이 느껴졌다. 커다랗고 앙상한 나무에 솟아난 모양을 따라 덧입혀진 하얀 선들이 누군가의 그림인 듯 꿈속 세상인 듯 모르게 펼쳐져 있었다. 그림을 감상하듯 한참 동안 풍경을 바라보던 도현과 현이는 활짝 열리는 커다란 베란다 문을 열고 아무도 밟지 않았을 눈 위에 그들의 발자국을 펼쳐 놓았다.


한참을 눈과 놀이를 하던 현이는 여행의 여정이 피곤했는지 금세 잠이 들었다.

  -아버지는 이곳에 먼저 와보신 건가.

저녁이 되니 아름다웠던 하얀 세상이 어둠 속으로 사라진 듯 캄캄하고 고요한 곳으로 바뀌었다. 현이를 토닥이던 손이 멈추더니, 도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곤 대답이 없던 지선을 대신해 한마디 더 건넸다.

  -이런 곳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확실하네.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은 곳. 하얀 눈 덮인 세상. 뾰족 솟아난 건물들. 사실은 지선에게도 하나하나 의미가 부여되고 있었다. 어둠이 주는 적막함은 한낮의 고요함 보다 더 많은 생각을 만들어 냈다.


요정의 아침식탁 위론 직접 만들었다고 하신 기다린 소시지와 으깬 감자가 있어고 푸석해 보였지만 먹어보니 촉촉했던 빵에 마당에서 키운 과일로 만들었을 잼을 발라 한입 베어 물었다. 늘 먹고 마시던 밥상은 아니었는데 풍족했다. 모든 것이 풍부했다. 꽃잎이 그려진 작은 그릇도, 벽을 타고 올라간 식물들도, 장작을 넣으면 활활 타올라 따스하게 만들 난로도. 어떠한 마음으로 이곳을 지었을지 하나하나 손길이 닿았을지 느껴지는 감사하고 풍부한 아침이었다.


풍족한 아침 식사를 마치곤, 벽돌로 동그랗게 모양을 낸 작은 아치문을 지나 또 다른 하늘색 오두막집에 들어갔다. 우리의 숙소로 지정된 그곳의 또 다른 문을 열면 넓은 뜰이 펼쳐졌다. 그림 같은 풍경 속에 지선과 가족들이 뛰어들었다. 넘어져도 아프지 않을 잔디밭 위에 소복이 쌓인 눈을 밟고. 뛰는 듯이, 날아오르는 듯이 한참을 그렇게 달렸다.


독일 시골마을의 하늘색 오두막집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은 일주일이었다. 이곳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이 더디게 흐르기를. 지선의 마지막도 더디게 흐르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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