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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벨 Oct 24. 2024

작은 마을

5부

마을을 비추는 봄볕 같은 따스함이 서서히 피어나자 이슬을 머금은 풀잎들이 싱그럽게 반짝였다. 저 멀리 보이는 빛 나는 보석을 가득 품은 호수는 살랑이는 바람에 춤을 추듯 예쁘다고 말하는 것이 풍족하도록 만들었다. 조금의 빛조차 허락되지 않을 이곳의 어둠은 고독하고 그윽하게 내려앉더니 시간이 되어 점차 빛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짙은 어둠에 깊게 반짝이는 하늘의 별을 보고 있자니 별빛의 아름다움에 잠들 시간조차 잊어버려 어둠이 걷히고 점차 밝아지는 아침햇살까지 움직임 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무섭도록 캄캄하더니, 아침 햇살은 너무 예쁘다.

깊은숨을 들이쉬었다가 몸 안의 모든 숨을 내쉬는 소리가 나더니 도현의 목소리가 지선의 등뒤에서 들렸다.

  -무섭도록 캄캄했는데, 반짝이는 별이 너무 예쁘게 빛나는 밤이었어.

지선이 보지 못할 둘만의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많이 보고 싶었다. 도현과 현이가 어느 날 지선의 무덤에 와서 넌지시 일상을 이야기할 때, 독일 시골마을의 별빛이 어떠했는지 사사로웠던 모든 일의 우리들이 품었던 아름다움과 슬픔과 미움이 어떠했는지 기억해서 그들의 이야기에 공감하고 싶었다.


어느덧 부스럭 대는 작은 움직임이 들렸다. 지선은 아들 현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모기장 없이도 잠 잘 자네.

  -그야. 엄마아빠가 지켜주니까. 모기 없도록 지켜주니까 그렇지.

구멍 뚫린 어리숙한 모기장에 구멍이 뚫려 있는다는 사실을 현이도 알까. 알아도 몰라도 둘 다 좋겠다.


남편 도현은 현이가 깨기도 전에 사라지더니 이내 야외에 있는 널따란 주방에서 할머니와 함께 요리를 하고 있었다. 아침부터 활활 불을 땐 화덕에서 기다란 주걱으로 피자를 꺼내고 있는 도현이었다. 바삭한 도우에 촉촉한 토마토와 향긋한 바질이 있는 피자였다.


  -처음인데 어떻게 이렇게 잘했어?

  -글쎄 소질이 있나.

피자를 만들어 화덕에 구웠던 아침이 기분이 좋았는지 아침부터 생글생글한 미소로 가족을 즐겁게 해 주었다. 도현의 입 주변에 깊게 파인 주름진 미소가 오랜만이었다. 따뜻한 것을 두고 마주 앉아 먹는 아침식사도 오랜만이었다.

  -자주 눈이 오는 건 아니었는데. 그대들이 오기 전에 마을을 덮을 눈이 펑펑 쏟아지더니 이렇게 온통 하얀 마을이 되었어요. 겨울에도 그렇게 추운 마음은 아니니 밤엔 조금 서늘하지만 낮은 따뜻할 거예요.

할머니께선 어제보단 따뜻해진 오늘의 풍경을 바라보며 말씀해 주셨다. 시내로 나가는 우리들에게 도시에서 꼭 봐야 할 명소들을 여러 군데 안내해 주시고 꼭 먹어봐야 할 디저트가게까지 소개해 주셨다.


독일 시내는 보기만 해도 온화하고 웅장해지는 건물들이 자연 속에서 새싹과 함께 자라난 듯 자연스럽고 아름답게 솟아 있었다. 다큐로만 보던 건물들이 눈앞에 나타나자 현이는 건축물에 매료되어 행복한 생각을 하는 듯 보였다.

  -여기 있는 건축물 말이야. 백 년도 넘은 거라고 했는데. 요정할머니도 보셨겠다. 그렇지?

  -그렇겠지 이곳에 사시니

  -그럼 우리 할아버지도 이거 보셨을까?

  -그건 잘 모르겠는데?

  -만약에 보셨다면, 나처럼 우와- 대단하다- 이렇게 감탄했겠지?

  -뭐 그럴 수도 있지.

  -그럼 우린 같은 감정을 갖게 된 거잖아. 엄마가 늘 말하던.

  -그렇지 같은 시간을 공유하는 거지.

현이가 찾아냈다. 같은 시간을 공유하는 방법을 말이다. 외롭지 않을 군데군데 어딘가에 숨어 있을 시간과 감정을 공유하는 방법. 현이가 알아봐 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작고 아기자기한 크리스마스소품가게에 들른 지선은 할머니께 드릴 소품을 한 개 구매했다. 도현은 다음장소를 알아보고 있었고. 현이는 가게를 지은 건물의 생김새와 쌓아 있는 모양에 관심을 가졌다. 우린 이렇게 각자의 모양으로 이 아름다운 도시를 즐겼다.


신비롭고 아름다운 세상에 오게 된 우리는 일주일의 여행을 마음속에 품고 다시금 네모난 아파트에 들어서게 될 것이다. 그곳에서 당연한 아침과 매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살아갈 것이다. 하지만 지선은 그마저도 감사한 일상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와 엄마가 사라져 버린 식탁과 침대는 따뜻하게 만든 음식을 차갑게 먹어버릴 아침이 될 수도 있었다. 이들에게 지선이 없을 날들이 죽기보다 싫은 날이 되지는 않을까. 지선이 느끼는 죽음의 고통에 가깝게 마음을 도려내는 고통이 되지 않을까. 이따금 몸을 욱여넣는 고통을 느끼는 지선에게 거뭇하게 내려앉은 캄캄한 밤은 이들이 느끼게 될 앞으로의 모든 절망을 지선이 혼자서 흐느끼는 밤이었다.


  -혼자서 이불을 옮기고 계셨어. 본인보다 더 큰 이불을 가지고 내려오는걸 그냥 보고 있을 수가 없어서.

이른 아침 일어난 도현은 할머니를 보았다고 했다. 무겁지는 않아 보였는데. 버거워 보였다고. 혼자서 이곳저곳 가꾸시는 모습이 아름답고도 쓸쓸해 보였다고 했다.

  -할아버지가 작년에 돌아가셨다는 말을 당신도 들었구나? 나도 그래서 안쓰럽게 보이긴 하더라고. 잘했네.

지선은 도현을 향해 미소를 지어 주었다.

  -근데 이상도 하지. 남편이 그리운데. 따스한 햇살이 마음을 토닥이고. 반짝이는 호수가 위로해 준대.

지선은 도현의 말에 역시나 낭만적인 할머니라고 생각했다.

  -당신은 어떨 거 같아? 자연에게 위로를 받는 건 가능할 것 같아?

지선의 물음에 도현은 글쎄라며 고개를 갸웃하더니

  -슬픈데 이상하게 맑지 않을까?

알 수 없는 대답을 하며 웃었다. 슬프고도 맑으면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 슬픈 건 확정인데 기분이 맑으면 좋을 수도 있겠다고 지선은 생각은 했다.


우다다닥, 현이의 발걸음이 저 멀리서 들리더니 안 그래도 동그란 눈을 더욱 동그랗게 뜨곤 다급히 지선을 불렀다.

  -엄마, 여기 있는 요정 할머니 말이야. 요정이 맞는 거 같아.

결심에 선듯한 현이는 지선을 향해 다급하고도 낮은 목소리로 말하였다.

  -왜, 날개라도 본거야?

현이의 단호하고도 조심성 있는 말투에 웃음이 새어 나오려다 입술을 꽉 깨물어 진정했다.

  -아니~ 나한테. 한국말로 '조심해'라고 말하셨어.

  -대단하네. 우리가 너한테 자주 하는 말이라 그 정도는 하시는 거 아닐까?

  -그리곤, 내가 넘어지니까 '괜찮아?'라고 물으시고는 '약 바르자'라고 하셨어.

  -그렇게 많은 말을 한국말로 아신다고?

  -그거뿐만 아니라. '이제 안 아파?'라고 하셨어.

무릎이 까진 현이는 아픈 것도 잊은 채, 요정 할머니를 유심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현이가 말한 부분이 조금은 신기했지만 관광객을 위한 숙소를 하시는 분께선 그 정도쯤은 익히고 계신 거라 생각했다. 현이는 지선과는 조금 다른 생각을 가진 듯이 할머니와 가깝고도 먼 곳에서 할머니가 내주신 음료를 마시며 힐끔힐끔 움직이는 모든 모습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현. 현아

할머니가 현이를 바라볼 땐 현이는 딴짓을 했다. 그러다 할머니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듣곤 그 자리에서 얼음이 되었다.

  -이리 와.

현이에게만 해주는 할머니의 한국말인 듯했다. 현이는 쭈뼛거리더니 이내 할머니에게 달려갔다. 어른 의자에 앉아 발이 닿지 않던 현이에게 어린이용 의자를 내어주셨다. 그리곤 현이가 가지고 놀만한 흙놀이 장난감을 내어 주셨다. 예상치 못한 선물에 함박웃음을 지어 보이는 현이는 할머니를 관찰하겠다는 계획을 잊어버린 듯했다.

  -현이는 여기서 오래 놀 것 같은데. 두 분은 마을 구경 좀 하고 와요. 소박하지만 예쁜 곳이 많아요.

할머니의 배려로 현이를 둔 채 도현과 마을 산책을 했다. 마을과는 많이 떨어진 곳에 숙소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조금 더 지나니 듬성듬성 집들이 보였다. 각기 다른 모양이지만 숲과 호수와 어울리는 집이었다. 탁 트인 드 넓은 호숫가에 다가가 할머니가 싸주신 보온병에 과일향이 진하게 베어든 차가 한가득 들어 있었다.

  -너무 따뜻하다.

차를 한입 머금은 도현이 말했다.

  -그렇지. 나는 할머니 마음이 따뜻해.

지선은 도현을 보며 씩 웃어 보였다.

  -당신 할머니도 따뜻한 분이셨다며. 당신에게 가장 따뜻한 순간이 할머니와 함께하는 날들이었다며.

  -그러게. 내 할머니는 따뜻하게 안아주셨다면. 여기 계신 할머니는 가만히 있어도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어.

  도현은 주머니에 넣어 따뜻해진 손으로 지선의 손을 잡아 주었다.

  -여기 오다 보니까 무덤이 있더라. 시골 마을이라서 그런가? 조금 으스스 하지? 돌아서 갈까?

  -외진 곳에만 무덤이 있는 게 아니라 시내에도 무덤이 있대. 우리처럼 외진 곳에 두는 게 아니라. 늘 가서 만날 수 있도록 자연스럽게 시내에 있는 것 같아. 어디 있었어?

  -여기 조금만 더 가면 있어.

  -나도 가볼래.

도현과 지선은 마을 가까이에 있는 무덤에 갔다. 무덤이라고 했지만 외진 곳이 아닌 길가에 마련되어 있었다. 주변에 놓여 있는 예쁜 꽃들이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이 제법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좋다.

  -무덤이?

  -이곳 분위기가, 왠지 아늑해. 따뜻하고. 여기 쓰여 있는 글귀들이 이분들이 어떻게 살았고. 어떻게 추모하는지 보이는 게 따뜻해.

  -할머니 남편분도 이곳에 계실까?

지선은 비석에 쓰여 있는 글귀를 찬찬히 둘러보았다.

  -이곳에 묻히면 마을을 지날 때마다 볼 수 있겠다. 그럼 늘 함께 하는 것 같은 마음이잖아. 그나마 가까운 곳에.

마을을 한 바퀴 돌아보며 곳곳에 숨어 있던 것들을 발견했다. 추위가 가시면 드러날 예쁜 것들도 궁금했다.

도현은 이곳이 따스한 여름이 될 때, 한번 더 방문하자고 했지만. 지선이 대답하지 못했다.

  -우리 그냥 여기 작은집을 하나 사서, 이곳에 살까?

  -진심이야?

  -바람이야. 나는 너무 좋을 것 같아. 이렇게 한적하고 아름다운 것을 매일 본다는 건. 너무 행복한 일이잖아.

도현은 현실적으로 안될 일지만 이곳에서 사는 것이 허락된다면 그렇게 하고 싶다고 했다.

  -안될게 뭐야.

지선의 대답이 조금은 낯설게 느껴졌나 보다. 도현이 웃어 보였다.


일주일뿐인 이곳에 천천히 스며드는 우리가 어색하고도 예뻤다. 하얀색 세상을 품은 빛이 드리우면 초록빛 세상으로 변하는 한적한 시골마을에 우리가 태어나지 못했을까. 시멘트 바닥에 각진 네모집 보단 더 아름다운 곳이 곳곳에 너무 예쁘게 자리하고 있는데. 우리의 삶은 각진 네모집에서 시작된 것일까. 어젯밤 쉽게 잠들지 못했던 아들 현이가 나에게 질문을 던졌었다. 독백이었는지. 궁금증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현이의 인생이 스스로의 답을 찾아가기 위한 여정이라고 생각했다. 정해진 답이 있다면 우린 자연에 스며들 수 없을 것이다.


이곳의 일상이 점점 내 것이 아니었던 나지막한 꿈이었다고 말해주는 마지막 날의 아침이었다. 차곡차곡 담아왔던 트렁크의 짐들이 이곳이 주었던 추억까지 고이 담아 배불러진 가방을 토닥였다. 열고 닫고 넣기를 반복하던 도현은 다시금 짐을 풀어놓고, 가방의 반을 차지한 이곳의 커다란 돌멩이까지 트렁크에 담을 수 없다고 현이에게 토닥이며 말했다. 현이는 모든 것을 담아 가고 싶었다고 울먹였다. 현실을 직시하는 아빠와 몽실몽실한 생각을 내보이는 아들의 모습이 귀여웠다. 결국 예쁘다는 이유로 한국행 비행기를 탈뻔한 돌멩이는 작은 알갱이의 돌멩이로 바뀐 뒤 트렁크에 넣어졌다.


지선은 밤새 찾아든 고통에 어젯밤도 날을 지새웠다. 이곳에 온 지 일주일째 잠에 들지 못했었다. 한 번은 별빛이 예뻐서. 한 번은 도현과 밤새 이야기를 하느라. 다른 모든 날들은 밤에 찾아온 고통과 앞으로의 모든 일이 걱정이 되어 쉽사리 잠에 들지 못했다. 선선한 날씨였지만 지선에 이마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괜찮은 거야?

지선의 모습을 유심히 관찰하던 도현이 물었다.

  -그럼.


도현은 알았다. 지선의 일상이 달라졌다는 것을. 그간 이곳에 온 뒤로 쉽게 잠에 들지 못하는 지선을 보았었다. 무엇이 일상을 깨뜨렸는지 알 수 없지만. 연락이 없던 아버지의 연락을 받은 이후와 아버지의 죽음 이후의 지선의 그녀가 가지고 있던 견고한 틀이 조금씩 틀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지선은 평범하지 않은 가정에서 사랑을 많이 받고 자라지 못했다고 했다. 하지만 도현은 지선이 부족하지 않을 보살핌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강인한 책임감으로 지선이 알 수 없을 사랑의 방법으로 가정을 지키려고 노력하신 아버지와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했을 지선에게 살아 있는 짧은 삶의 시간 동안 많은 애정을 쏟아주신 할머니. 그리고 지선의 삶에 등장한 따뜻한 주변의 정까지. 지선은 넘어지지 않을 단단한 테두리에서 자라온 사람이었다.


잠깐의 휴식이 달콤했던 어린 현이는 아침부터 마당에 나가 있었다. 나뭇가지로 흙바닥을 깊게 파더니 뾰로통한 얼굴로 어린이용 나무의자에 앉아 발끝으로 흙바닥을 파내고 있었다.


  -조금만 더 깊게 파면 들어가 버리겠는데?

아빠의 말에 재미난 상상력이 펼쳐진 현이가 피식 웃더니, 이내 다짐한 듯 다시 시무룩한 얼굴을 보였다.

  -그래도 어쩔 수 없어. 가야 해.

도현이 아이를 달래는 데는 재주가 없다고 느끼는 지선이었다. 시무룩해진 현이 앞에 요정 할머니가 나타나 현이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할머니와 눈이 마주친 현이가 할머니를 와락 껴안았다.

  -할머니. 요정할머니 고마웠어요. 내가 이담에 커서 할머니 찾아올게요. 나는 할머니는 없는데. 할머니가 있다면 이렇게 나를 돌봐줬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두 팔로 할머니를 꼭 안은 현이는 할머니가 알아들을 수도 없는 말을 웅얼웅얼 이야기했다.

  -고마워. 보고 싶을 거야.

노란 머리의 외국인 할머니가 또박또박 한국말로 말을 건네자. 자신에게만 주는 특권 같은 단어를 듣곤 현이는 할머니를 놓칠 수 없다는 듯이 한번 더 꼭 안아 주었다.


휴식은 잠시라 더 좋은 걸까. 열심히 살았기 때문에 누릴 수 있는 마음인 걸까. 매일이 휴식 같은 일상을 가진다면 우리의 삶은 더 기쁠지 의문이었다. 일주일 전 이곳에 처음 발을 내딛던 곳까지 멈춰 선 후 이곳에서 처음 만났던 풍경을 다시금 눈으로 담아 보았다. 며칠 전 산책 중에 마주친 현이의 요정할머니에게 질문을 하나 했었다.


  -좋은 건 계속 봐도 좋은 걸까요. 잠깐 뿐이라 더 좋은 거라고 느껴지는 걸까요.

  -매일 좋은 풍경을 보는 내겐. 그것이 그저 감사함이지.


매일 눈을 뜨면 자연스레 감사함이 느껴진다고 했다. 누군가 내 옆에 없다는 것이 외로울 법도 하지만 자연이 주는 치유에 감사하다고 말이다. 공항으로 가는 기차를 타고 멀어져 가는 이곳을 바라보며 처음 보았던 환희가 아닌 고요한 침묵의 시간으로 아름다웠던 자연과 인사했다.


북적이는 공항은 각각의 이야기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잠시 머물기 위해 도착한 설레는 목소리와 업무를 위한 바쁜 발걸음과 가족과의 만남과 헤어짐을 반가워하고 슬퍼하는 모든 복잡한 감정들이 다양하게 섞여 있는 곳에 지선의 마음은 설레지도 슬프지도 반갑지도 않은 미묘한 생각이 생각을 헤집고 있었다. 케리어를 끌고 저만치 멀어진 도현에게 다가간 지선은 그의 케리어를 붙잡았다.


  -미안하지만. 나는 이곳에 남아야 할 것 같아.

가야 할 곳이 있는 우리에겐 이곳에 남는다는 의미는 도무지 도현이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나랑 현이는 어쩌고.

지선의 달랐던 모습들을 떠올려 보았다. 아름다운 풍경에 그렇지 못한 표정을 하는 지선의 모습들이 도현의 머릿속에 스치듯 지나갔다.

  -그러게 갑자기 생각이 든 거라. 지금 당장 선택하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아서. 그것까지 고민하지 못했는데. 곧 생각을 정리해서 다시 부를게. 이곳에.

알 수 없는 말을 했다고 생각했다.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는 것은 쉬웠지만. 그것을 정리하는 머릿속은 지선에게도 혼란이었다.

  -그렇게 해.

한참 동안 멍하니 지선을 바라보던 도현은 굳은 의지를 가진 그녀의 말에 나긋하게 힘을 실어 주었다. 지선이 지금 하고 있는 생각이 옳을 거라고 네 선택이 맞을 거라고 말하는 듯했다.


현이를 으스러지게 안아 주었던 것 같다. 가슴이 푹 파여 버린 고통을 느낄 때마다 파인 이곳에 다른 것을 쑥 하고 넣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럼 덜 아플 거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다. 으스러지게 안아 현이의 마음을 지선의 마음에 쑤욱 넣었다. 잠시 동안의 헤어짐은 평온했다.


아버지의 그리움은 지선이 가져야 할 그리움까지 사라지게 만들었다. 같은 그리움으로 물들 법도 하지만. 그리움이 지긋지긋 해져 버렸다. 매일 똑같은 반찬 보다. 아버지의 똑같은 그리움이 더 싫었다. 오늘 덜어낸 어머니의 그리움은 다음날 더 커졌다. 말하지 않아도 눈빛에서 커져 버린 그리움이 가득했던 아버지였다. 지선은 아버지가 내 몫의 그리움까지 가져갔었다고 늘 생각했다. 그리움을 가지지 못한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리움으로 사무치는 마음을 주었던 어머니는 아버지의 삶을 미리 알았다면 그렇게 떠나지는 않으셨을 것이다. 지선은 도현과 현이에게 어떠한 그리움을 남길 수 있을지 생각했다.


아주 떠날 것 같던 이곳에 다시 돌아왔다. 평소의 지선이라면 하지 못했을 순간의 마음을 실행에 옮겼다. 평범하고 당연한 삶이 익숙했던 지선이었다. 계획적인 삶이 평온하다고 생각했던 지선이었다. 마음속 저만치 싹튼 마음을 용기로 바꾼 몇 시간 전 상황이 다시 찾아온다고 해도 쉽게 할 수 있는 선택은 아니었다. 온몸을 누르던 무거웠던 마음속 짐이 사르르 녹아 버렸다. 이젠 정말 쉴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커튼 사이로 살며시 스며든 빛이 지선의 발끝을 비추었다. 감춰 있던 빛의 문을 활짝 열어 따스한 볕이 기운을 반갑게 맞이했다. 몽글하고 따사로운 볕은 지선에게 폭신한 이불이었다. 그렇게 일주일을 지새운 걱정과 고민의 짐을 내려놓은 그날. 충분한 잠에 취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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