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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벨 Oct 26. 2024

준비

7부

아내 지선을 독일에 남겨두고 도현과 현이는 무거워진 발걸음으로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비어진 지선의 자리를 보며 도현이 모를 지선의 또 다른 감정을 이해하려 노력했다. 결코 쉽지 않았을 말이었다. 단지 아버지의 죽음이 지선의 모든 것을 바꾸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더구나 어린 현이까지 내 곁에 맡겨둔 채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알아차리기 힘들었다.


현이의 손을 잡고 공항을 빠져나왔다. 현이도 엄마가 왜 그곳에 혼자 남았는지. 잠깐 할 일이 있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지만. 비행기에서 내내 이마를 감싸고 생각에 잠겨 있는 아빠에게 묻기는 더 곤란했다. 셋이 떠난 여행에서 둘이 되어 돌아오는 여행길이 쓸쓸했다.


  -아빠, 허전하지? 엄마가 없어서.

  -아니, 현이가 있어서 괜찮아.

  -내가 봤는데. 엄마가 좀 아픈 거 같아. 비행기를 못 탈정도로.

  -아... 그랬어? 어떻게 아픈 거 같은데?

  -멀미인가? 비행기가 붕 뜰 때 귀가 먹먹하면서 하늘에 높이 오르면 울렁일 때가 있거든. 엄마가 그게 멀미라고 했는데. 엄마가 멀미 같아. 토하고. 울렁거리다고 하고.


현이는 엄마의 진짜 마음은 다를 수 있지만. 아빠가 모르는 엄마의 상황이 조금은 이렇지 않을까 고민하며 나름 아빠를 위로하는 말을 건넸다. 비행기를 못 탈 정도로 멀미가 심해서 조금 있다가 오는 거라는 현이의 말이 조금 이해가 되기도 했다. 지선은 조금은 아파 보였다. 매번 약도 먹었었고 화장실에 들어가면 기운이 빠져서 나오곤 했었다. 정말 어디가 아픈 건가 싶다가도. 그것이 다는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드는 도현이었다.


도현의 기억 속의 지선은 특별했다. 새내기 입학생 중 특이한 아이가 있다고 소문이 났었다. 검고 긴 머리에 가느다란 팔과 다리를 가진 그녀는 조금은 안색이 안 좋아 보이기도 해서. 다들 같이 어울리는 것을 꺼려했다. 하지만 별다른 특이점은 보이지 않아서 있는 듯 없는 듯 무던한 학교생활을 하고 있었다. 도현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다른 사람을 입에 올리길 좋아하는 아이들이 한데 모인 자리에선 지선의 태도를 문제 삼기도 했었다. 그다지 남들에게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았지만. 가만히 있는 것도 불편한 듯 지선을 괜한 문젯거리로 이야기했다. 도현이 느끼기엔 그냥 모든 게 서투른 것 같았다. 그래서 조심하는 듯 보였다. 자신이 불편해도 다른 이는 불편하게 만들지 않으려는 조용하게 지내고 싶은 사람들의 특징이라고 생각했다. 대학 생활을 심심하고 따분하게 여긴 여러 명의 아이들이 마치 실험을 하듯 그녀에게 무례하고 어이없는 일들을 하기도 했다.


  -걔는 진짜 별 생각이 없다니까. 누가 먼저 사귀나 내기. 어때?

  -야 만원씩 걷어.


한 번은 여럿이 모여 고백을 하는 상황을 만들어 그녀를 곤란하게 만들기도 했다. 단지 불편했다. 괴롭히는 사람들도 무례한 일에 맞서지 않는 그녀도.


  -지선아. 내가 며칠을 고민했는데. 아무래도 내가 너를 좋아하는 거 같거든.

  -아. 네...


대학생이나 돼가지고 이게 뭐 하는 짓인지. 숨어서 그 모습을 지켜보는 아이들과 내기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말로 얼른 넘어오길 바라는 아이나. 참 한심해 보였다. 단지 그래서 그랬다.


  -진짜. 못 봐주겠네. 니들 그만 안 해.

도현이 지선과 마주 앉은 동기를 바라보며 갑자기 나타나 한마디 했다.

  -야 네가 뭔데 이래.


그러한 용기가 어디서 나왔는지. 도현의 갑작스러운 등장과 말에 내기에서 이기고 싶어 안간힘을 쓰던 동기는 커다랗게 치켜뜬 눈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도현에 몸에 자신의 배를 밀어 보였다. 그동안 싸울 생각이 없어서 몰랐었는데. 대뜸 도현에게 배를 들이민 동기는 등치가 컸다. 허리를 펴고 몸을 늘려서 그런지 키도 많이 커 보였다. 싸워서 이길 수는 없겠다 싶었다. 그래서 불쑥 튀어나왔다. 한방으로 제압될 그 말이.


  -내 여자친구야. 니들 진짜 까불면 가만 안 둬. 나와.

자리에 앉아있던 지선의 손을 낚아채듯 잡아서 문을 열고 나와 버렸다.

  -뛰어!

문을 닫고 나와 조금은 빠른 걸음으로 걷던 도현과 지선은 유리창 밖과 내부에서 지켜보던 동기들이 저만치 멀어졌다 싶어서 지선의 손을 잡고 뛰었다. 들킬 것 같았다. 내가 봐도 연기가 별로였다. 숨을 헐떡이며 담뒤에 숨은 도현은 어느덧 지선과 함께였다. 무서운 동기들과 멀어졌지만. 손을 잡은 그녀가 내 옆에 있었다. 손을 뿌리친 그녀가 크게 한마디 할 거라 생각했다. 이 상황을 뭐라 설명할지 고민했다. 뛰어오느라 숨이 차서 뛰었던 심장이 그녀가 빤히 바라보니 더 크게 뛰었다. 헐떡이는 도현을 빤히 보던 그녀는 도현을 땀을 닦아주었다. 자신도 그 정도의 장난은 알고 있다고 했다. 근데 뭐라고 말할지 뭐라고 화낼지 고민하고 있을 때. 갑자기 나타났다고 말이다. 한참은 망설이더니. 고맙다고 했다. 대뜸 아무렇지 않게 고맙다고 했다면. 어 그래. 하곤 멀어졌을지 모르겠지만. 그녀의 고맙다는 한마디는 진심이었다. 그동안 자신의 마음을 용기 있기 말하는 것이 어려운 그녀가 내뱉은 용기였다. 그래서 괜한 책임감이 들었다. 지선이 학교엔 잘 왔는지. 어디서 또 험한 꼴은 당하는 것은 아닌지. 없으면 불안해서 내 옆에 두는 게 편했다. 대신 화내고 대신 욕해줬더니.


  -야 좀 쏟을 수도 있지. 이게 어딜 선배를 아주 쥐 잡을 듯이 보네.

  -쏟을 수도 있는데. 그럼 먼저 미안하다고 사과해야 하지 않나요? 매번 내 앞에선 당연하듯 실수하는 거 조심해 줄 수 있지 않아요?


어느새 스스로 할 말을 할 줄 아는 그녀가 되더라. 못하는 게 아니라 참는 게 쉬운 사람이었다. 그저 눈 한번 감으며 없었던 일이 된다고 했다. 참는 게 가장 쉽다고 했다. 그렇게 잘 참던 그녀가 참지 못할 일이 생긴 것이 분명했다.


뚜렷한 계획을 가지지 못했던 지선은 그녀가 차려준 밥상을 먹고 한적한 동네를 거닐며 많은 생각을 했다. 정확한 계획을 구상한 것은 아니었지만. 더 이상 지체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내 삶이 짧아질수록 그들의 고통이 길어질 것 같았다. 이젠 도현에게 말해야 했다.


꺼져버린 전화기를 충전하고 다시 켰더니 지선을 걱정하는 도현의 메시지가 여러 건 있었다. 한국에 잘 도착한 이야기를 건네는 메시지. 현이의 일상을 알려주는 메시지. 날씨에 관한 메시지들이 모두 지선을 걱정하는 것 같았다. 도현의 성격으로 몇 번씩 쓰고 지웠을 간단하지만 고민이 많은 메시지였다. 답장이 없어서 걱정이 될법했지만. 다그치거나 무슨 일인지 묻지 않았다. 기다리는 듯했다. 지선이 도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무 말이 없던 지선에게 도현이 먼저 말을 건넸다.

  -밥은 먹었어?

일상적인 대화였지만 목소리는 떨렸다. 가만히 듣던 지선이 말을 이었다.

  -미안해. 막무가내 상의 없는 통보를 묵묵하게 받아주는 당신이 고마웠어. 하지만 나는 얼마 남지 않은 삶을 선고받았어. 그래서 갑작스럽지만. 나에게 갑자기 온 이 결과를 묵묵히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당신에겐 일방적인 통보를 자주 한 것 같아. 우선 미안해.

지선의 떨리는 목소리로 시작된 고백이 도현에게 어떻게 전달되었을지. 어떤 말로 시작을 해야 덜 슬프게 느껴질지 여러 번 고민해 봤지만. 마음의 소리가 먼저 튀어나와 버렸다고 생각했다. 정신없는 지선의 마음이 그대로 말이 되어 나왔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어. 전혀.

  -남은 시간이 3개월이래.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고민이 되었는데. 3개월 동안 아파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건 안 하고 싶어서. 그런 모습으로 생을 마감하고 싶지 않아서 그랬어.

도현이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고 여러 번 말하며 울먹였다. 도현의 목소리를 듣던 지선도 참았던 눈물이 터져. 한참을 말없이 흐느꼈다. 울음소리로 가득 찼던 전화기에서 한숨을 크게 한번 쉬던 도현이 말을 이었다.

  -전혀, 다른 방법은 없어?

도현의 물음에 지선은 대답 없이 눈물만 흘렸다. 그 의미를 어느 정도 깨달은 도현은 우선 이 상황을 헤쳐나가고 싶었다.

  -그럼. 당신은 이제부터 어떻게 하고 싶어?

꾹꾹 눌러 담은 도현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이것도 갑작스럽겠지만. 나는 당신과 현이가 내가 없는 생을 그곳이 아닌 이곳에서 지냈으면 좋겠어. 자연에게 위로받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어. 매일 회사 다니며 내가 없을 그곳에 당신과 현이가 지내는 모습을 보는 게 마음이 아플 것 같아. 내 생각은 그런데 당신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니 시간을 두고 생각을 해봐.


지선이 건넬 말을 하나하나 곱씹었다. 남은 시간이 3개월. 믿을 수 없었다. 지선의 화장대 서랍을 열었다. 그리곤 옷장을 열었다. 중요한 것들이 이곳에서 나왔던 것 같았는데. 지선이 먹었던 약봉투를 찾았다. 지선의 아버지가 죽기 전 다녔던 병원. 전화를 걸어 담당 선생님을 뵙고 싶었을 뿐인데. 3개월 후에 예약을 할 수 있다고 했다. 3개월이 이렇게 짧은 날이었다니. 질끈 눈을 감았다 뜨곤. 사람을 다 죽이고 나서 해결을 할 거냐고 되물었다. 그러더니 곧장 담당 교수님이 전화를 주셨다.


  -송지선 씨 보호자 되신다고요. 일전에 뵀었죠? 제가 예약된 환자가 많아서. 괜찮으시면 퇴근 후에 만나드릴 수 있는데.


지선의 담당선생님은 아버지의 담당의사 선생님이기도 했다. 매번 보던 흰가운이 아닌 정장차림의 선생님은 병원 안에 있는 1층 카페에서 도현을 기다리고 있었다. 도현을 먼저 알아보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이곳에 앉으라고 했다. 도현의 상기된 얼굴을 보던 선생님은 도현이 이곳에 도착하기 전에 지선과 통화를 했다고 한다. 어디까지 이야기를 해도 될지 물었고. 모든 이야기를 해도 된다고 전해 들었다고. 그래서 지선이 받았던 검사와 나눴던 이야기를 전해주셨다. 3개월의 삶이지만 지선은 마지막을 후회 없이 보내고 싶어 했고. 그래서 나머지의 작은 희망을 목표로 삼으며 죽음을 맞고 싶지 않다고 했다. 아버지를 진찰할 때도 늘 봐왔던 지선의 모습이 눈에 선하기에 따로 지선에게 전화를 걸어 일상을 물어보곤 했다고 한다.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으니 지선이 들었을 막막함과 고통이 전해졌다. 뭐든 참는 게 이기는 거라고 하던 그녀가 끝내 아픔도 참았겠구나 싶으니 조금씩 화도 났다. 숨길 수 없는 눈물이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터져 나왔다.


회사에도 가지 못한 채 이틀 동안 밤을 지새웠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겨우 한자리의 희망이 진짜 인지 이곳저곳에 문의했지만 방법이 없었다. 기적과도 같은 일이 있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기적은 없었다. 억누르던 감정에 화도 냈다가 울었다가를 반복했다. 결국 지선이 겪을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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