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제가 있는 학교는 며칠 뒤에 떠날 수학여행 준비가 한창입니다. 교사는 교사대로, 학생은 학생대로 수학여행 준비에 정신이 없습니다. 학생들은 짐 싸느라 바쁘냐고요? 아니오. 수학여행의 꽃인 레크리에이션 준비를 위해 틈 날 때마다 교실 뒤에 모여 춤 연습을 하느라 바쁩니다.
'트렌드코리아 2024(김난도 외)'에서 2024년 우리나라의 트렌드 중 하나로 육각형 인간을 키워드로 선정하였습니다. 이 키워드를 보는 순간 '아, 우리 아이들이다!'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요즘 고등학교 아이들을 보고 있으면 제가 지금 고등학생이었으면 학교 다니기도 버거웠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예전처럼 공부만 잘해서는 안 되고 체육, 미술, 음악, 글쓰기, 독서, 발표는 물론이고 춤과 노래까지 잘해야 하는 그런 시대가 되었거든요.
육각형 인간 : 외모, 학력, 자산, 직업, 성격, 특기 등 모든 분야에서 약점없는 인간을 선망하는 경향
요즘 고등학생들은 너무 바쁩니다. 차분히 자신의 미래를 준비해 나가기에는 주어지는 과제가 너무 많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우리 학교 아이들만 해도 중간고사를 치고, 수학여행을 다녀오고, 그 와중에 10개에 가까운 교과별 수행평가를 해내고, 돌아서면 기말고사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사이에 축구, 피구, 배구, 배드민턴 스포츠클럽 경기도 치러야 하고, 친구 관계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이런 수행 과제들에 치이다 보면 하나둘 포기하는 아이들이 나옵니다. 우선 학생 자율에 맡기는 활동들에서 빠지게 되고, 그다음은 수행평가, 또 그다음은 지필고사, 급기야 수업까지 포기하는 아이들이 생깁니다. 극단적으로는 친구 관계조차 접어버리는 아이들이 생기죠. 이런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이 많은 것들을 해내기 위해서는 고등학교에 대한 준비가 미리 필요하다는 생각이 더욱 절실해집니다.
그렇다면 왜 중학교가 아니라 초등학교부터 준비해야 할까요?
고등학교 준비를 초등학교 때부터 한다고 하면 참 유난스럽다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중학교에서도 충분히 가능하지 않냐고 반문하실 수도 있습니다. 저도 예전엔 그런 마음이었습니다. 그랬던 제가 초등학교에서부터 준비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된 이유는 수많은 뇌과학 책들에서 아이들의 뇌발달이 이루어지는 결정적 시기를 12세 이전으로 꼽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으로 '12세 전에 완성하는 뇌과학 독서법(김대식)'이라는 책에서는 평생의 뇌를 좌우하는 결정적 시기를 12세로 보고 있습니다. 12세 이후에도 학습은 가능하지만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12세 이후에는 새로운 뇌구조가 만들어지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즉, 12세 이전에 우리 아이가 보고, 듣고, 느낀 것이 아이의 평생 뇌구조로 자리 잡는다는 것이죠. 이후 새로운 정보가 들어오더라도 아이는 이 뇌구조 안에서 정보를 받아들이고 사고하게 됩니다. 어떤 뇌과학 책에서는 이와 같은 근거를 들어 뇌 발달의 결정적 시기가 지나면 인간은 외부의 자극으로는 변화하지 않고, 자기 스스로의 결정으로 인해서만 변화한다고 말합니다.
이런 연구 결과들은 고등학교에서 잘할 아이로 키우는 데 있어 두 가지 측면을 시사합니다. 첫째, 아이가 고등학교에서 잘할 힘을 갖추기 위해서는 초등학교 시기에 뇌구조 형성을 위한 다방면의 경험이 필요하다는 것. 둘째, 부모 혹은 교사가 아이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은 초등학교 시기가 넘어서면 힘들다는 것입니다. 굳이 뇌과학을 근거로 들지 않아도 '중2병'이라는 말만 떠올려 봐도 사춘기에 접어드는 중학교 시절 고등학교를 준비하는 것은 쉽지 않아 보입니다.
그렇다면 초등학교에서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요?
학교에 있어보면 선행은 어느 정도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선행이란 것이 단지 학습 진도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학업 면에서도 필요하긴 하지만 그전에 선행되어야 할 것이 아이의 자존감 신장, 학업 태도 형성, 체력 신장 등입니다. 즉 지, 덕, 체 측면에서 두루 준비가 필요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앞으로 아이가 마주할 수많은 과제를 끈기 있게 해낼 수 있는 힘, 작고 큰 갈등과 시련 속에서도 꿋꿋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과 같은 정서적 측면을 준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초등학교 시기는 아이가 정서적으로, 지적으로, 체력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말랑말랑한 클레이 같은 시기입니다. 아이 스스로도 다방면으로 성장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는 시기이고, 부모 및 교사와 같은 어른의 손길로 더 멋진 모습으로 성장할 수 있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이런 아이들이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 단단하게 굳은 하나의 클레이 작품이 되어버리는 셈이죠. 뇌과학 같은 어려운 이야기들을 모두 차치하더라도 초등학교 시기는 절대적으로 시간이 넉넉하기에 눈앞의 성과에 연연하지 않고 여유로운 마음으로 아이의 정서적 측면을 다질 수 있습니다.
고등학교에서 잘할 아이로 키우기 위한 준비를 하는데 초등학교만 한 시기가 없습니다. 초등학교에서 기본부터 찬찬히 다지는 고등학교 준비로 우리 아이들이 바쁜 고등학교 시기, 보다 여유롭게 성인으로서 사회에 나아갈 준비를 하기를 소망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