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는 이름은 고유 명사이다.
엄마. 라는 이름은 도저히 보통 명사가 될 수가 없다.
누구에게나 그렇다.
누구에게나 다 그렇다.
5월은 유난히도 달력에 동그라미를 칠 날이 많다.
5월 1일 _ 근로자의 날 혹은 노동절
5월 5일 _ 어린이 날
5월 8일 _ 어버이 날
5월 15일 _ 스승의 날 혹은 성년의 날
5월 21일 _ 부부의 날
5월 27일 _ 부처님 오신 날 (음력 4월 8일)
이 외에도 달력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더 많은 기념일이 쓰여있다.
예를 들면 유권자의 날, 바다식목일, 동학농민혁명기념일, 입양의 날, 가정의 날,
5.18 민주화운동기념일, 발명의 날, 세계인의 날, 문화다양성의 날, 방재의 날, 바다의 날
거기다 입하와 소만까지.
5월 안에 기억해야 할 날이 이렇게도 많은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날들이 누구에게나 다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글 쓰는 이에게 근로자의 날은 해당 사항이 없고,
친한 어린이가 없는 이에게 어린이 날은 무의미하며,
결혼하지 않은 이에게 부부의 날은 기념해보고 싶은 날일지도 모른다.
또 불자가 아닌 이에게 부처님 오신 날은 그저 신나는 휴일일 뿐이고 말이다.
(아, 이게 그래서 제일 좋은 건가?)
의미가 없는 이에게 그날들은 그저 보통 명사겠지만
의미를 가지는 이에게 그날들은 고유 명사가 된다.
그것들이 가지는 각자의 무게감은 다 다르겠지만
내가 부르는 어린이도, 내가 부르는 엄마도, 내가 부르는 선생님도, 내가 부르는 남편도
의미를 가지면 그것은 더 이상 그저 보통의 이름이 아니다.
그런데 이렇게 각자의 고유 명사는 다르지만 누구에게나 절대적으로 고유 명사인 공통의 이름이 있다.
바로 '어버이' 즉, '엄마', '아빠'라는 이름이다.
어떤 방법으로든 어떤 의미로든 엄마와 아빠 없이 존재하는 사람은 세상에 없으니까.
날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어버이 날'이야 기억하고 싶은 사람이 있고, 기억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을 수 있다.
또 챙길 수 있는 사람이 있고, 챙기고 싶어도 챙길 수 없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엄마 혹은 아빠라는 이름은 좀 다르다.
대체로 엄마는 지독한 그리움이고 연민이고 또 애증이다.
버리려야 버릴 수 없는 이름이고 잊으래야 잊을 수 없는 이름이다.
엄마라는 단어만 들어도 그냥 후드득하고 눈물이 떨어지는 일도 다반사이니.
그 눈물 속에 숨은 의미는 굳이 묻지 않아도 누구나 유추할 수 있는 공통의 감정일 것이다.
세상에 좋은 엄마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더없이 존경스럽고 자애로운 엄마가 있을 수도
한 없이 밉고 이해되지 않는 엄마가 있을 수도 있다.
나에게 마르지 않는 사랑을 끝없이 내어주는 엄마가 있을 수도
나에게 일말의 애정도 보이지 않는 엄마가 있을 수도 물론, 있다.
지극히 나를 살피고 돌보는 어른으로서의 엄마가 있을 수 있고
가장 기본의 먹이고 입히고 재우는 양육도 하지 않는,
그 자신도 미성숙한 인간으로서의 엄마도 있을 수 있다.
그럼에도 그 모든 엄마는 나에게 있어 고유 명사이다.
각자에게 너무도 소중한, 너무도 깊은, 너무도 절절한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나도 누구의 엄마이다.
그 누구에게 어떤 엄마가 될 것인가.
누구에게 어떤 의미로 기억될 것인가. 혹은 잊힐 것인가.
그것은 엄마가(아빠가) 되는 자의 몫이다.
어떤 엄마로서 살 것인가. 그리고 어떤 엄마로 죽을 것인가.
그것은 내가 기억하는 엄마의 모습을,
나에게 남은 엄마의 의미를 초월해야만 한다.
내가 보아 온 엄마에 국한되어서는 안 된다.
인간이 본 대로 살 수밖에 없다고는 하지만
우리는 성인이고 지성이 있고 이미 알고 있는 것 이상을 깨우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러니 내가 누군가의 삶에 어떤 고유 명사로 남을 것인가.
누군가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그 아이에게 어떤 우주를 내어 줄 것인가.
잊지 않고 고민해야 한다. 부지런히 생각해야 한다.
어제 내가 아는 남자는 새벽 3시에 잠을 털고 왕복 600km를 다녀왔다.
300km쯤에서 그는 걷지도 앉지도 말하지도 먹지도 못하며
마침내 욕창으로 온몸이 상처뿐인 그의 아버지를 만나고 왔다.
그와 그의 아버지에게 허락된 시간은 고작 20분이었다.
그 20분 동안 그는 아버지의 얼굴을 쓰다듬고 팔을 주무르고
흰 눈 같은 머리칼을 어루만지며 짓무른 상처를 닦아 내었을 것이다.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도 아버지의 눈을 바라보며 쉼 없이 말을 걸었을 것이다.
천금 같은 20분이 지나고 돌덩이 같은 마음을 안고 아버지를 보내주었을 것이다.
다시 돌아오는 300km, 5시간 동안 그는 얼마나 많이 울었을까.
아버지의 젊고 단단했던 날들, 엄하고 단정했던 품성, 그가 내어주었던 깊디깊은 사랑,
그와 보내었던 시골의 푸르고 화창했던 시간들, 이미 떠나간 그의 엄마...
그 모든 것들 때문에 명치가 내내 아프진 않았을까.
뜨겁게 마시던 아메리카노가 목구멍에 걸려 데이진 않았을까.
손에 든 소설책이 흐리게 번져버리진 않았을까...
그의 아버지가 그에게 갖는 의미를 내가 감히 다 안다고 할 수는 없다.
다만 짐작할 뿐이다. 보아온 그로, 보아온 그의 아버지로, 유추할 뿐이다.
그래서 그가 그리는, 그가 곱씹는, 그가 간직하는 그 시간과 의미를 존중해주어야 한다.
그에게 아버지는 너무도 뚜렷하고 현재인 고유 명사니까.
오직, 단 하나니까.
5월은 어쩐지 여러 가지로 먹먹해지는 달이다.
지나간 것을 추억하되, 내가 만들어 갈 날들을 잊어서도 안된다.
어쩌면 그렇게 우리는 5월을 맞아 각자의 숙제를 받았는지도 모른다.
고유 명사가 된 보통 명사로도
생에서 받은 내 이름으로도
사회적 관계 속에서 만들어진 호칭으로도
나는, 내 삶에서 또렷하고 단정한 고유 명사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당신을,
단단하고 소중한 고유 명사로,
아름답게 기억될 이름으로,
그렇게 만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