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2. 3차원으로 바라보기; 만남, 핑계

"그 길 위에서"

by 그리울너머


"그 길 위에서 만남"


'여기' 혹은 '저기'에서의 공간과 공간 속에서.

우리는 만날 수 있을까?, 아니, 우연이라는 핑계를 삼아, 마주칠 기회가 찾아오기를.


너를 마주치기 전까지 내 일상은 평범했다. 혼자 소일거리를 치우고, 늘어놓으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뚜렷한 동기부여가 없이 집 밖을 나서는 일은 드물었기 때문에, 미뤄놓은 책 한 권을 가방에 넣고 문밖을 나섰다. 거리 위의 사람들은 북적였다. 노점상에서 물건을 파는 상인들, 물건을 고르는 행인들, 수다를 떨고 전화를 받으며 각자의 길을 걸어간다.


사람들은 그걸 ‘볼 일’, 이라고 부른다. ‘일’이라는 뚜렷한 목적을 안고 ‘여기에서 저기로’ 향한다. 정해진 길은 없어도, 각기 다른 방향으로 걸어가는 모습은 운명처럼 보인다.


그냥, 책을 읽어야지 하고 나선 거리에 뒤엉켜 있는 듯, 낯설게 느껴진다. 이 사람, 저 사람들이, 이 소리, 저 소리들이 어쩐지 내가 알던 세상과 다른 리듬처럼.


이 이야기, 저 이야기하기로 정해져 있었던 것처럼. 문득 내가 나선 거리에 사람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움직인다. 욕심도 부리고, 양보도 하며, "여기는 내 자리", "저기는 내 자리"라 말하는 듯.
횡단보도의 신호를 기다리고, 오늘 점심 메뉴를 정하고, 꼭 저 길로 저기로 걸어가야 한다는 듯. 그렇게 모두가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다. 그리고 나도, 이 호흡에 맞춰 한 발짝 움직인다. 그러다 보면, 오늘 읽으려던 책을 비로소 읽을 수 있을까. 결국엔, 오늘 읽어야지 했던 책을 또 미뤄지겠지. 뚜렷한 동기나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집 밖으로 나설 핑계가 필요했을 뿐이니까.


1차원 더 내다보아 저 사람이 무엇을 할지, 어디로 갈지.

그게 아니라면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알았더라면,

내가 너를 만나기엔 좀 더 빨랐을 텐데.





지구 한 바퀴를 돌아

나를 만나다.

그리고

너를 만나다.






오고 가는 만남 속에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찰나의 만남은 인연보다, 하찮은 우연이었을까.

너와 내가 만났다. 지구 한 바퀴를 돌아 찬란한 빛으로 만났다.


인연이었을까.


내가 너에게 닿기를, 네가 나에게 오기를, 그렇게 우연의 핑계로.

너와 내가 만났다.

우연보다는, 가늘고 길게 이어진, 필연으로, 급할 필요 없이 천천히.

너무 느리지도 않게, 이 줄이 끊어질까, 노심초사 줄다리기 중이지만.

“아쉬워할 필요 없어”, “어차피 우린 조금 특별해” 하고 생각해 보았지만.

아쉽게도, 지구는 육칠십억 인구를 중력의 힘으로 당긴다.

멋있는 공간은 아니었지만, 그 와중에 그렇게 너와 내가 만났다.

“괜찮아 돌아가는 길을 잃어버리지만 않으면 돼”

그렇게 다짐하고.

잠시 그렇게 만났다.


,


돌아가는 길을 잃어버렸다면 잠시만 그렇게 머무를게.


“오늘은 등대의 불빛이 너무 곱다.”



"그 길 위에서 핑계"


이 만남들은 여운 속에서, 문득 작은 이유들이 발걸음을 재촉한다. 어느새 우리 일상엔 소소한 '핑계'들이 자리 잡아, 잔잔한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있다. 그리하여 오늘 나는, 만남의 아련한 잔영을 뒤로 한 채, 한 걸음 가볍게 새로운 이야기를 향해 발을 내딛어 본다. 이제 그 길 위에서 핑계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우리 삶의 작은 장면들이 자연스럽게 이어지기를 바라본다.



그런 거 있잖아, 너의 강의 시간이 언젠지 알았다면 너의 길 길목으로 지나갈 핑계를 마음속으로 되새김질하지. 내가 이쪽으로 지나가는 이유는 '이것' 때문이야 하면서 말이야.


핑계로 떠난 발걸음이 꼭 나만은 아닐 거야.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것은 '핑계'이다.

그냥 당신에게 말을 한번 걸어볼 이유를 만든 것이고, 당신을 만나기 위해 핑계를 댄 것뿐이지.

같은 시간 같은 곳으로 향하는 발걸음, 어쩌면 우연히 지나가다 한번 마주한 그런 이유로 발걸음을 옮긴 탓이겠다.


그래서 오늘은 네가 그 길로 지나갈 것만 같았다.

그래서 오늘도 우연을 빌려, 우연을 핑계로 한번 마주할 그런 핑계를 만들었다.


꼭 오늘이 아니어도 되겠지, 발걸음을 옮기는 데는 꼭 이유가 있을까. 이 핑계, 저 핑계 만드는 거지 뭐. 기대를 품고 떠난 발걸음에는 언제나 인연이 있겠다. 당신이 있을 것만 같은 기대감에, 핑계를 둘러대고 발걸음을 옮겼다.


당신이었다.


꼭 발걸음뿐일까, 밥 먹을 핑계를 만들어보고, 연락할 핑계를 만들어 보는 거지 뭐.

가끔은 그래도 되잖아.


여행을 떠난 발걸음에, 오늘은 꼭 비가 와야만 하는 것처럼 핑계를 댔다. 구름 하나 없는 밤하늘에 비가 한두 방울 오는 듯 마는 듯, 한두 방울 떨어지는 날씨에 내가 가야 할 길을 잃었다면 제자리에 잠시 머무를게.

핑계 댈 거리를 찾았다.


“비가 와!”

“여기는, 비가 와!”

내일의 날씨는 맑음이겠지 아마도.


‘우연’은 아닐 거야, 떠난 발걸음을 뒤로하는 길에는, 바쁘다는 말도 ‘핑계’ 그렇게 덮어두자.




연락해 볼 핑계를 만들어 보았고,

얼굴 한번 볼 핑계를 만들어 보았어,

마주칠 핑계를 만들기 위해.

네가 있던 곳을 걸었고,

애써 못 본척하기 위해 그냥 크게 웃었어.

내가 못 본척해도 알아 봐줄까.

그렇게 웃었어.




혼자 대만 여행을 갔을 때였다. 낯 일정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 소나기가 촉촉이 왔다. 우산이 없어 살짝 비에 젖었지만 다행히 비가 그쳤다. 나에게는 거북한 향신료 때문인지, 입맛이 없어 대충 저녁을 때우고 야경이 좋다는 이유로 용산사로 발걸음을 향했다. 비는 그치고 촉촉이 땅바닥을 메꿨다. 용산사에서 반달 조각을 던져 사랑의 소원을 비는 노인을 보았다. 한참 동안 던지고서야 고개를 숙인 노인은 발걸음을 옮겼다.


오랜 시간 동안 간직할 수 있는 짝사랑이 있을까. 여러 생각이 가슴 한편 비공기로 가득 채웠다.


“이런 걸 믿어?”


생각하고 미소 지으며 나도 소원을 빌어보았다.

내일도 올 것만 같은 미련에 다음날도 용산 사를 찾았다.

향신료 냄새 때문인지, 비 냄새 때문인지, 상쾌하면서도, 씁쓸했고. 뒤로하는 발걸음이 한결 가벼웠다.

핑계 댈 거리를 찾았다. 간단한 ‘메시지’를 보냈다.


“대만 놀러 왔어.”

,

오늘 밤.

비가 한두 방울, 오는 듯 마는 듯.

그날의 핑계를 마침표 하나에 덮어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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