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 대통령이다! 박근혜 처음 만난 날

by 고승혁

*이 글은 사견입니다....저는 난신적자가 아니에요


대통령 오는 날

아침부터 분주했다. 국회 본청 로비에 건장한 경호원들이 들락거렸다. 사진기자 선배들이 본청 현관에서 본회의장까지 이어지는 로텐더홀에 줄지어 늘어섰다. 새정치민주연합 의원들은 황급히 본회의장 맞은편 예결위 회의장으로 집결했다. 긴급 의원총회(당 소속 의원 전원이 모이는 회의)가 오전 9시에 소집됐다. 오전 10시에 박근혜 대통령이 국회를 방문해 시정연설을 할 예정이었다. 명절(?) 날 아침처럼 활기찬 국회의원들 덕에 기자들도 덩달아 바빠졌다. 노트북을 들고 로텐더홀과 본회의장 방청석을 종횡무진 오갔다.


이종걸 "내가 난신적자라니.." / 아이뉴스


미묘한 열기가 느껴졌다. 새까만 양복을 차려입은 백여 명의 국회의원들이 굳은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이종걸 원내대표가 단상으로 나가 입을 열었다. 그는 "새누리당의 한 최고위원은 우리 야당을 향해서 화적떼, 세작, 난신적자, 이런 말까지 극언을 퍼붓고 있다"며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거대한 홀에 순간 정적이 흘렀다. 노트북을 두드리는 기자의 타이핑 소리만이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대통령 연설이 40여분 남았다.


화적떼 / 군도


이틀 전 야당 의원들은 정부가 비밀리에 운영하던 국정교과서 비밀 TF를 기습 방문했다. 공무원들은 불을 끄고 문서를 세절했다. 문을 열지 않았다. 경찰이 건물을 에워쌌다. 야당 의원 몇몇은 가을 밤을 꼬박 새웠다. 이들에게 새누리당 이정현 최고위원은 '화적떼'라며 맹비난을 퍼부었다. 분홍빛 아침 동이 틀 때까지, 연분홍빛 종이로 유명한 모 석간신문 기자는 김광진 의원과 함께 졸며 깨며 현장을 지켰다. 여당의 주장대로 '화적떼'라고 표현하기엔 현장에 있던 의원이나 기자나 그렇게 날렵한 인상이 아니었다. 난신적자(亂臣賊子)라고 하기엔 다들 마음씨가 모질지 못했다.


"난신적자를 안아주세요" / 무신시대


이 원내대표는 "교육부총리와 청와대 실장은 국정감사에서 허위 증언을 했다"며 "불법 저지르고 방조, 부추긴 작자들의 궤변 듣자니 분노 솟구친다"고 말했다. 분명 정부는 국정교과서를 추진하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행정예고 기간인만큼 시민들의 의사를 수렴한 뒤 결재하겠다고 말했다. 모두 거짓이었다.


"인터넷이 안 돼!!" / deeth44 이글루스


그러나 정부여당의 거짓말보다도 당황스러운 건 '인터넷 두절'이었다.


노트북 '무선 네트워크'를 아무리 클릭해봐도 와이파이가 잡히질 않았다. 짐짓 비장함으로 무장한 새정치연합 의원의 모습을 실시간으로 보고해야 하는데 인터넷이 끊겼다. 설상가상으로 스마트폰 테더링도 멈췄다. 심지어 통신도 두절돼 전화조차 할 수 없었다. 가뜩이나 보고가 늦어 허둥지둥 대던 나였다. 나는 소리 높여 새누리당을 준엄하게 꾸짖는 도종환 의원을 뒤로 한 채 살금살금 회의장을 빠져나왔다. 나무를 쪼는 딱따구리처럼 경박스레 와이파이 새로고침을 눌러댔지만 소용없었다. 로텐터홀 붉은 카펫에 주저앉아 요모조모 노트북 설정을 둘러보다가 포기했다.


나는 설마 해서 타사 기자들에게 인터넷이 되는지 물어봤다. 다들 스마트폰이고 노트북이고 통신이 먹통 됐다고 불만이었다. 나중에 유은혜 의원에게 물어보니 원인은 '대통령'이었다. 대통령이 오면 경호상의 이유로 주변 통신을 전부다 끊어 놓는다고 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 때도 이명박 전 대통령 때도 마찬가지였다고 했다. 나는 누가 전파통신으로 대통령을 해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보았다. 어떤 난신적자가 와이파이로 작동하는 부비트랩을 대통령 가는 길에 설치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니면 화적떼들이 3G 네트워크의 특정 주파수로 전자동 권총의 방아쇠를 원격 조작할지도 몰랐다. 나는 SF적 상상력을 발휘하며 경호와 와이파이의 상관관계를 추측해봤지만 도저히 무리였다. 다만 국민들과 적극 통신해야 할 우리의 대통령이 통신을 끊어놓고 다닌다니 안타까웠다. 나는 붉은 카펫에 주저앉아 하염없이 와이파이를 새로고침 했다.


"무대야 박수 건성건성 쳤다면서? 언니 좀 보자" / 국민일보


난생처음 대통령을 보러 가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먹통이 돼버린 휴대폰을 손에 쥐고 국회 본청 3층 방청석 입구로 갔다. 대통령의 연설을 보기 위해선 사전 신청한 기자들만 신분을 확인 한 뒤 방청석에 입장할 수 있다. 나는 국회 출입기자증을 보여주고 노트북을 경호원에게 건넸다. 금속탐지기를 손에 쥔 경호원이 다리부터 팔과 목까지 샅샅이 더듬어가며 내가 난신적자인지 아닌지 훑어봤다. 그들은 내가 별로 위험해 보이지 않았는지 노트북을 돌려주고 방청석에 들여보냈다.


유은혜 의원이 친한 척 하는데 이언주 의원이 외면하는 게 포인트 / 국민일보


안에서는 대통령이 입장하기도 전에 여야 간의 신경전이 진행되고 있었다. 새정치연합 의원들은 대통령이 볼 수 있도록 '민생 우선' '국정교과서 반대'라고 쓰인 A4용지를 모니터 뒤에 붙여놨다. 정의화 국회의장은 야당 의원들에게 "품격을 지켜달라"며 선전물을 떼라고 했다. 새누리당 의원들은 야유를 하거나 소리치며 야당 의원에게 "대통령을 존중하라"고 외쳤다. 새정치연합 지도부는 문재인 대표 자리에 모여서 서로 이러저러한 의견을 나누고 있었다. 이종걸 원내대표는 정의화 의장에게 가서 선전물을 떼지 않겠다고 밝혔다. 결국 대통령은 국정교과서를 반대한다는 내용의 A4용이 100여 장을 마주한 채 연설을 해야 했다. 박근혜 대통령 연설문의 문단 문단마다 새누리당 의원들은 박수를 쳤다. 총 54회였다. (나는 54회라고 셌는데, 56회라고 센 언론사도 있다. 저마다 보도도 다르다.)


안타깝게도 이날 청와대가 초청한 80여 명의 보수단체 회원들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대통령 연설 직전 청와대 직원이 이들에게 "박수 치치 말라"고 경고했던 건 괜한 우려였었다. 선배 기자 말로는 대통령 연설하는데 청와대가 단체 참관인을 데려온 건 이례적이라고 했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국민행동본부란 극우단체 회원으로 2009년 6월 덕수궁 대한문 앞의 노 전 대통령 분향소를 강제 철거하고 영정을 탈취한 적도 있다. 대통령의 긴 연설 덕에 숙면을 취하다 깬 한 남학생에게 여기에 어떻게 왔냐고 물으니 "개인자격으로 왔다"며 손을 휘저었다. 곁에 있던 여학생에게 같은 질문을 하자 "청년단체 회원이라 같이 왔다"고 답했다. 손발이 맞지 않은 참관인들을 보며 마음이 까끌까끌해졌다.


"화적떼놈들!!" / 뉴시스 (파란 후드는 안철수 부인)


이날 대통령의 표정과 연설톤에 대해 수 많은 말이 오갔다. 모 유력지 기자 선배는 "싸늘하다"라는 표현을 썼다. 또 다른 기자는 대통령이 떨리는 목소리로 빠르게 국정교과서를 추진해야 한다고 외치자 "노기가 서려있다"고 표현했다. 나는 눈빛이 기억에 남았다. 이청준의 표현을 빌리자면 형형하게 빛나는'전짓불' 같았다. 너는 어느 편이냐 묻는 전짓불. 군인은 초가집에 숨어있는 가난한 여인을 찾아내 눈에 '전짓불'을 들이밀었다. 그리고 너는 어느 편이냐 캐물었다. 여인은 눈이 부셔 전짓불 뒤의 군인이 국군인지 인민군인지 알 수 없었다. 절체절명의 순간. 생사를 이분법으로 가름하는 시간. 그때가 1950년이었다. 나는 적화통일과 난신적자와 세작이란 단어가 국회에서 오가는 요즘이 과연 몇 년도인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대통령이 퇴장하자 비로소 와이파이가 잡혔다. 밀려있던 문자메시지가 쏟아져 핸드폰이 쉴 새 없이 몸을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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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장아장 정치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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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아장아장 정치부 '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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