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문재인 그리고 '말'

아장아장 정치부 여덟번째 이야기

by 고승혁

첫번째 출장, 광주


실처럼 가느다란 빗줄기가 끊이지 않았다. 귀에 선 억양이 곳곳에서 들려왔다. 묘하게 달뜬 분위기였다. 조선대학교 총학생회에 속한 학생들이 장내를 정리했다. 강당 전면에 걸린 커다란 현수막엔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 조선대학교 특별 강연회'라고 적혀있었다. 분명 대학생 대상 강연회였지만 나이가 지긋한 사람도 간간히 보였다. 웅성거림이 좀체 잦아들지 않았다. 강당은 400여명의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나는 맨 앞줄에 앉아 노트북을 켰다. 배터리가 채 10%도 남지 않았다.


이러니 싸움이 안 납니까?


문재인 대표는 연설을 참 못했다. 곳곳에서 꾸벅꾸벅 조는 학생들이 보였다. 그는 강연이 시작하자마자 선거구 획정과 관련된 정무적이고 기술적인 이야기를 20여분간 했다. 결론은 광주 선거구를 지키기 위해 이런저런 노력을 했지만 협상이 결렬돼 아무것도 확정된 게 없다는 것이었다. 너무 길고 지루했다. 새누리당의 오만과 변덕을 효과적으로 드러내기엔 역부족이었다. 나는 고개를 숙인 채 끊임없이 손가락을 두드렸다. 문 대표는 조심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호남 민심이 흉흉하다는 말을 인이 박이게 들었을 터였다.


"언니 저 맘에 안들죠?"/ 조선일보


이날 문 대표는 정치적으로 중요한 발표를 할 예정이었다. 조선일보는 전날 문 대표가 안철수 전 대표에게 연대를 제안할 것이고, 받아 들이지 않으면 당대표직 사퇴까지 거론할 수 있다고 보도했다. 다른 언론사들도 세부적인 내용은 조금씩 다르지만 문 대표가 이날 중대발표를 할 것이라고 썼다. 광주에 동행한 기자들만 25명이었다. 이례적인 숫자였다. 나는 난생 처음 '출장품의서'를 써서 부장과 국장에게 결재받았다. 처음 고속열차란 교통수단을 이용해봤다. 휙휙 차창 밖이 흘러가는 걸 보며 거대한 컨베이어벨트에 놓인 공산품이 된 기분이 들었다. 날이 궂어 비가 끊이지 않았다.


"당대표 권한 노나줄게 도와주라" / 한겨레
"에게...?" / 뉴스1

마침대 문 대표가 중대 발표를 한 건 강연이 시작되고 20여분이 지난 뒤였다. 그는 '문안박 연대(문재인, 안철수, 박원순 연대)'를 제안하며, 안철수 의원과 박원순 시장에게 지도부의 권한을 나눠주겠다고 발표했다. 장내가 술렁거리며 누군가 드라마틱하게 입을 쩍 벌렸으면 좋았겠지만 현장은 고요했다. 고조 없는 평이한 말투로 그토록 중요한 말을 내뱉기도 쉽지 않을 것 같았다. 문 대표는 안 의원의 말이 백번 지당하다며, 당 대표 권한을 나눠 줄테니 함께하자고 손을 내밀었다. 이전까지 그는 안 의원이 무슨 말을 해도 제대로된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안 대표측 관계자는 "문 대표가 안 의원이 무슨 제안을 해도 가타부타 말이 없다"며 "특단의 대책을 20일에 발표하겠다"고 말했었다. 특단의 대책이 '탈당'이 아니냐는 뜬소문까지 나오던 참이었다.



나는 문 대표의 말을 모니터에 옮기며 곱씹어봤다. 내일 신문에는 "야권 정개개편의 신호탄"이란 문구가 나올 것 같았다. 전날 모 일간지 선배는 "분수령이니 신호탄이니 하는 말 좀 그만 쓰고 싶다"고 하소연했다. 지당한 말이었다. 뭔가 시작할 때마다 매번 신호탄이라고 쓸 순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시작'을 의미하는 다양한 비유를 생각해 보았다. 그러고보니 국회에선 모든 행사에 앞서 '국민의례'를 했다. 사람들은 한 해를 시작할 때 '해돋이'를 보러 갔다. 그렇다면 "문재인 강연회, 정개개편의 국민의례" 또는 "광주, 정개개편의 정동진"이란 표현은 어떨까 생각해봤다. 고개가 절로 돌아갔다. 내 인생의 첫 시말서를 이런 사소한 은유 때문에 쓸 순 없었다. 그렇지만 문 대표의 조곤조곤한 발표는 '신호탄'이란 역동적 표현보단 아무래도 '국민의례'라고 쓰는 게 적절해 보였다. 의례적인 느낌이었다. 문 대표가 입을 열 때마다 강당 전체가 약간 웅웅 거렸다. 마이크 밸런스가 어긋난 모양이었다.


권력이란 원래 주건희 받건희 하는 것 / 네이트 판


비는 여전히 그치지 않았다. 먹구름 때문인지 광주는 도심 전체가 잿빛이었다. 창문에 맺힌 빗방울이 시시각각 또르르 굴렀다. 언제부터인가 우산이 보이지 않았다. 옆 자리에 앉은 석양빛 일간지 기자는 문 대표가 조선대학교에서 강연하면서 '헬조선'이란 표현을 쓰는 게 적절한지 의문을 품었다. 나는 그의 참신한 의문에 감격했다. 그렇지 않아도 강연장에서 한 남자 대학생이 N포 세대에 희망을 주고싶다는 문 대표의 발언에 "우리는 N포 세대가 아니다. 꿈이 있다"며 고성을 내질렀었다. 그렇지 않아도 미묘하게 삐걱대던 분위기가 순간 차갑게 얼어붙었다. 강연 직후 모 종합지 선배는 "N포 세대란 말이 청년을 시혜대상으로 보는 것 같긴 하다"고 나지막히 읊조렸다.


헬조선은 어법에 맞지 않아요


대합실에 앉아 카라멜 마끼아또를 마셨다. 당직자 선배는 커피에 더해서 도너츠까지 사줬다. 나는 사자 갈귀 모양 도너츠를 두개나 먹었다. 단 걸 먹으니 괜시리 웃음이 나왔다. 서울에 도착해선 부대찌게를 먹으며 소주 몇 잔 기울였다. 대변인과 부대변인 선배에게 이런 저런 당 내외 사정을 들었다. 문 대표가 안철수 의원과 지도부 권한을 나누기로 한 만큼, 기존 지도부의 거센 반발이 예상됐다. 당장 주승용 최고위원과 오영식 최고위원이 문 대표의 중대 제안을 반대한다며 기자들에게 입장을 밝혔다. 대변인 선배는 새정치연합 대변인으로서가 아니라 먼저 기자를 해본 선배로서 "워딩이 아니라 맥락에 집중하라"고 조언했다. 맞는 말이었다. 투명한 잔에 소주를 7부정도 부었다. 건배를 했다. 취기가 올랐다. 나는 속으로 맥락에 집중하라는 대변인 선배 말 뒤에 몇 단어를 더 붙여봤다. "맥락에 집중하되, 의심하자" 나는 아무튼 기자였고 이곳은 누가 뭐래도 여의도였다. 곧이 곧대로 믿다가는 자빠지기 십상이었다. 대변인 선배도 "정치인 말 듣고 우우우 몰려가다가는 놓치는 게 생긴다"고 덧붙였다.


취재원을 의심하자 / SBS


소주 냄새를 풍기며 용산역에서 택시를 잡았다. 택시 기사에게 집 주소를 부른 뒤 안기듯 의자에 푹 파묻혔다. 기자에게 가장 중요한 건 현장이란 말이 떠올랐다. 미묘하게 달뜬 조선대학교 강당의 분위기가 잊히지 않았다. 문 대표를 향한 호남 민심이 심상찮단 말은 너무 평면적이었다. 머리칼이 센 노인도, 이제 막 마흔이 된 중년도, 대학생도, 문 대표를 향해 소리질렀다. 그렇지만 절대 비난하는 건 아니었다. 국정교과서를 반대해서 지지한다는 내용이었고 청년 정책에 신경써서 고맙다는 말이었다. 허나 응원의 뉘앙스도 결코 아니었다. 질책과 기대가 어지럽게 뒤섞여 구분이 되지 않았다. 어쩌면 기자라는 직업은 내 생각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 투성일지 몰랐다. 내가 고를 수 있는 단어보다 현장은 훨씬 더 복잡했다.



11월 3주차 '주요 정치 기사'

1. ‘文·安·朴 연대’ 첫걸음은 뗐지만…

2. [노동입법 힘겨루기 본격화] 與, 환노위 위원 증원 추진… 野“표결 노린 꼼수” 반발

3. [국회 정보위 보고] 국정원 “北-IS 연계 가능성 상존”… 증거는 없어

4. 한·중 FTA 비준안 연내 처리


"어머 이건 사회기사지만 읽어봐야 해"

1. 평화시위 지켰나 시위대·경찰에 묻는다 인권 보호했나

2. [르포] “수심 150m 압력” 물대포는 거셌다… 경찰, 3000rpm 강도 살수 시연


<아장아장 정치부>

1. 아장아장 정치부 '하나'

2. 아장아장 정치부 '둘'

3. 아장아장 정치부 '셋'

4. 아장아장 정치부 '무대'

5. 아장아장 정치부 '연기대상'

6. 아장아장 정치부 '김밥'

7. 아장아장 정치부 '박근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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