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장례식, 한 편의 부조리극

아장아장 정치부 9. 김영삼, 전두환 그리고 오래된 정치인들

by 고승혁

개인 블로그에 쓰는 글인 만큼, 본 글은 사견입니다


장면 하나. 전두환


자기가 만든 거대 여당이 결국 자기가 싸웠던 독재를 다시 부른 꼴
이종석씨의 댓글_노컷뉴스 '촌철살인' 中


전두환이 25일 서울 연건동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김영삼 전 대통령 빈소에서 헌화한 뒤 악수를 나누고 있다 / 공동취재단


전두환은 생각보다 조그마했다. 그리고 당당했다. 건장한 남성 둘을 경호원으로 대동한 채 그는 장례식장으로 들어갔다. 김근태를 고문하고 박종철을 죽인 반란 정부의 수괴는 바른걸음으로 똑바로 김영삼 전 대통령의 영정 앞으로 나아갔다. 그는 방명록에 커다란 글씨로 "고인의 명복을 기원합니다"라고 적었다. 순간 '명복'이라는 단어가 무슨 뜻인지 궁금해졌다. 사전을 찾아봤다. 그곳에는 '죽은 뒤 저승에서 받는 복'이라고 뜻풀이가 되어있었다. 그러니까 전씨는 김 전 대통령에게 죽은 뒤 저승에서 복 받으라고 기원한 것이었다.


나는 광주 망월동 묘지에서 보았던 5.18 당시의 사진이 떠올랐다. 대검으로 가슴이 도려내진 여자 옆엔 몽둥이에 맞아 두개골 절반이 짓무른 사람이 버려져있었다. 터진 눈알과 곤죽이 된 뇌가 아스팔트 위에 흘러내렸다. 개울가에는 멱 감던 아이들 시체가 무더기로 널려있었다. 군용 트럭을 타고 가던 군인들이 심심풀이로 누가 더 많이 맞추나 내기를 한 흔적이었다. 시민들은 전두환이 임기 말 광주시청 앞에 심은 기념식수에 제초제를 뿌렸다. 고작 나무에 제초제를 뿌릴 수밖에 없었다.


김 전 대통령 빈소 내빈실에 앉아서 대화하는 전두환. 전두환 오른쪽에 앉은 김수한 전 국회의장이 전두환의 장수를 기원했다 / 공동취재단


오후 4시가 조금 넘어서, 전씨는 김 전 대통령 영정에 헌화를 하고 내빈실로 들어갔다. 내빈실 상황부터는 연합뉴스와 경향신문 선배가 취재한 뒤 전 언론사에 풀(현장 취재 공유)하기로 되어 있었다. 나는 전씨가 나오길 기다리며 장례식장 현관 앞에 쪼그려 앉아 카카오톡을 들여다보았다. 실시간으로 현장 상황이 업데이트됐다.


"전두환은 편안하게 앉아있음"

"당당하고 정정한 모습"

"장수하실 겁니다라는 말에 진짜 기분 좋은 듯 웃기도"


김 전 대통령의 장례식장에서 옛 정치인들은 전두환의 장수를 기원했다. 김수한 전 국회의장이 전씨에게 "우리 대통령께서는 상당히 장수하실 겁니다"라고 말하자 전씨는 김 전 의장의 손을 꼭 잡으며 "고맙습니다. 나는 담배 안 피우고 술도 안 마시고,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며 웃었다. 김 전 대통령의 차남 현철씨가 바로 옆에 있는 자리였다. 현철씨는 전두환 왼편에서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없이 앉아있었다.


나는 도저히 현장 상황이 머리에 그려지지 않았다. 풀기자가 보낸 문장과 실제 현장 상황이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전씨는 "100세 시대 그거 뭐 살아서 뭐해요? 자식도 고생시키고 고생하고, 건강하게 살다 건강하게 떠나는 게 본인을 위해서도 좋고, 가족들을 위해서도 좋고"라는 말을 내뱉었다. 수 천, 어쩌면 수 만 명의 목숨을 빼앗고도 살아남은 전씨는 그저 모든 것이 좋게 보였나 보다.


김무성은 자신이 김영삼 전 대통령의 정치적 아들이라며 상주를 자임했다 / 공동취재단


결국 살아남은 자는 전두환이었고, 노태우였으며 김종필이었고 박근혜였다. 김대중과 김영삼과 김근태는 죽었다. 김무성 같은 사람이 빈소에 하루 종일 버티고 앉아 '김영삼의 정치적 아들'을 자임하는 세상이었다. 일제 식민통치와 군부독재가 경제성장을 견인했다고 주장하며 교과서를 하나로 통일하려는 세력이, 평생을 박정희와 맞서 싸우고 조선총독부를 철거한 김영삼 빈소에서 상주 노릇을 하고 있었다. 전씨가 내빈실 상석에 앉아 장수를 기원받으며 웃을 수 있는 세상이 대한민국이었다. 지금의 대통령은 이걸 아름다운 역사로 묘사해야 아이들이 자긍심을 가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아직 11월 말이었다. 울이 가려면 한참 남았다.


3당 합당의 주역들. 왼쪽부터 박태준, 김영삼, 노태우, 김종필


장면 둘. 오래된 사람들


(의원이) 70대도 중진, 한 80대가 돼야…저보다 선배도 계시고 그래야 한다.
서청원_새누리당 7선 의원


김 전 대통령의 빈소에는 수 많은 옛날 정치인들이 찾아왔다. 누가 와서 어떤 말을 했는지 기록하기 매우 힘이 들었다. 기자들은 장례식장 현관문 앞에 쪼그려 앉아서 하염없이 들어오는 할아버지들을 바라보았다. 똑같이 생긴 할아버지들은 직업조차 똑같았다. 뭐 하는 사람인지 물어보면 죄다 전 국무총리, 전 국회의장, 전 장관이었다. 아직도 옛날의 위세에서 벗어나지 못한 할아버지 몇몇은 기자들이 누구인지 물어보면 "내가 누군지 몰라?"하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그러나 전 국회의장과 전전 국회의장과 전전전 국회의장과 전전전전이 끝없이 이어지는 국회의장과 총리들 사이에서 김 전 총리가 김 전 총리보다 선배이고 박 전 의장이 박 전 의장보다 몇 대 앞서는지 파악하기는 불가능했다. 나는 다만 역사상 가장 유명한 총리로 기억될 정홍원 정도만 알아볼 따름이었다.



할아버지들은 대체로 욕심이 과했다. 이들은 카메라 앞에서는 김영삼의 유지를 받들겠다고 했지만 뒤에서는 전혀 다른 소리를 했다. 새누리당 서청원 최고위원은 내빈식당에서 "7선 의원이 국회에 저밖에 없다"며 "일본도 제가 많이 겪고 그랬는데, 70대도 중진, 한 80대가 되어야"한다고 말했다. 그가 국회에 "저보다 선배도 계시고 그래야 한다"고 말하자 마주 앉은 한 할아버지는 "그래 맞다 세대교체는 말이 좋지 정치를 모르고 하는 소리"라고 맞장구쳤다.


이들은 나라를 일본처럼 만들고 싶어 했다. 자민당이 독식하며 자식 손자에게 국회의원을 물려주는 나라, 고독사가 횡행하고 청년들이 히키코모리가 되어가는 그런 나라를 만들고 싶어 했다. 그리하여 국민 모두가 정치에 관심이 없어지면 80세가 되어서도 90세가 되어서도 국회의원을 계속할 수 있을 터였다. 이곳은 만 26세에 국회의원이 돼서 세상을 바꾸는 데 일조한 김영삼의 빈소였다. 다들 입에는 김영삼을 올리지만 속에는 김영삼이 없었다. 이름 모를 또 다른 할아버지는 "양원제"를 해야 한다며, 할아버지들만을 위한 새로운 국회를 만들자고도 주장했다. 이수성 전 국무총리만이 그 자리에서 말없이 묵묵히 앉아있었다.


내가 살다살다 김현철의 트윗을 블로그에 인용할 줄은 몰랐다.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 전 부소장.


한 편의 부조리극을 보는 느낌이었다. 죽은 김영삼 사진을 걸어두고 모두 딴 소리를 내뱉었다. 자신의 정권은 5.18 정신을 계승했다고 주장한 사람이 김영삼이었다. 어찌 됐든 조선총독부를 폭파한 사람도 김영삼이었다. YH여공을 보호하고 시위마다 선두에 나선 사람이 김영삼이었다. 그런데 정치적 아들이랍시고 상주로 나선 사람은 김무성이었다. 노조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며, 친일독재를 옹호하고, 시위대를 IS에 비유한 사람이 정치적 아들임을 자임했다. 온갖 할아버지들이 옆 방에 모여 '80대 중진론'을 운운하며 '물갈이는 정치를 모르고 하는 소리'라고 주장했다.


다만 이 욕된 빈소의 부조리한 상황을 기획한 사람은 결국 김영삼일 터였다. 삼당합당이 옳은지 그른지 잘 모르겠지만 그의 빈소가 이토록 터무니없는 말들로 엉키게 된 건 본인이 수구적 독재세력과 손을 잡았기 때문이었다. 김 전 대통령이 그토록 우습게 봤던 박근혜가 대통령이 됐다. 일베가 김대중을 욕 보이고 민주주의를 웃음거리로 만들었다. 중학생이 전두환을 찬양하고 텔레비전 시사프로그램에서 버젓이 김대중이 간첩이라는 내용이 방송되었다. 곳곳에 민자당의 유산이 묻어있는데 김영삼 본인의 빈소만이 깨끗할 수는 없었다.


*공유나 댓글 항상 감사드립니다



11월 4주차 정치기사.

정치 기사도 보다 보면 재미있어요(?) 정말인데.. 거짓말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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