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탁 위에 너무나 친숙한 채소인 감자지만, 사실 우리 역사에서 감자가 등장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조선과 청나라 국경을 몰래 넘어 인삼을 캐러 들어왔다가 적발되어 도망가는 청나라 심마니가 흘린 감자가 우리나라에 전파되었던 설과, 전라도 해안에 영국 상선이 표류하던 중 배에 타고 있던 네덜란드 선교사에 의해 전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어느 것이 옳다 하여도 감자는 19세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우리 땅에 들어왔다. 전래된 이후에도 한 동안 널리 심어지지 못했다.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는 신품종이 강원도에 자란 이후에야 비로소 전국에 확산되었다.
감자의 기원은 약 7000년 전 잉카의 조상들이 안데스 산맥에서 감자를 재배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전해진다. 안데스 산맥의 고원지대야말로 다양한 감자의 중심지였다. 지금은 감자 하면 한 가지 색을 떠올리지만 잉카인들은 대대로 파란 감자, 붉은 감자, 노란 감자, 오렌지 감자를 비롯해 수확기가 길거나 짧은, 단맛이 나거나 쓴맛이 나는 감자 등 3000여 종의 감자를 재배했다. 1588년 폭풍우에 난파한 스페인 군함으로부터 흘러나온 감자가 아일랜드 해안으로 밀려온 이래 아일랜드에서는 감자가 자연스럽게 재배작물로 자리 잡았다. 아일랜드 사람들은 면적이 충분치 않은 황폐한 땅이라도 기존의 밀에 비해 넉넉하게 가족과 가축을 먹일 수 있는 수확량과 상대적으로 적은 노동력으로 재배가 가능한 감자에 매료됐다.
서양에는 과거 음식재료에도 신분의 계급을 매기고 있었다. 조류와 같이 공중에서 구할 수 있는 것을 최상급으로 치며, 지상 위에서 생활하는 동물과 식물을 그다음으로, 그리고 보이지 않는 땅속에서 자라는 뿌리식물, 덩이줄기식물을 천시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또한 감자는 기독교 사회인 서구적인 시각에서 보았을 때 성경에 등장하지도 않았으며, 자신들이 지배하던 아메리카 원주민의 주식이라는 이유로 서양인들의 식탁에 오르는 데 오랜 기간이 걸렸다.
감자 재배엔 많은 일손이 필요하지 않았다. 또 특별한 농기구가 없어도 약간의 땅에 그저 씨감자를 흩어 놓고 아무 흙이나 덮어주기만 하면 됐다. 감자는 영양 면에서도 훌륭했는데, 우유와 감자만으로도 부족함 없는 열량을 얻을 수 있었다. 탄수화물과 단백질, 비타민B와 C를 충분히 섭취할 수 있었던 것이다. 감자 덕분에 유럽에서는 괴혈병이 점차 사라지는 등 건강 풍토도 바뀌어갔다. 영국인이 감자를 받아들이는 데는 다른 유럽 국가보다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한 때 영국에서는 자신의 식민지인이었던 아일랜드 사람들을 비하하는 말로 '돼지나 먹는 감자를 먹는 아일랜드인'이라는 말까지 썼다.
흥미롭게도 중세 유럽 왕실은 감자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독일의 프리드리히 대왕과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여제는 감자에 대한 편견을 깨기 위해 농민들에게 감자를 강제로 심도록 했다. 프랑스는 교묘한 방법을 썼다. 백성들로 하여금 보다 자연스레 감자를 재배하도록 왕실의 권위를 살짝 내려놓는 방법을 이용했는데, 왕비 마리 앙투와네트 머리에 감자 꽃을 여러 송이 꽂도록 하는가 하면, 왕실 정원에 감자를 심어 최정예 왕실 수비대가 이 감자밭을 지키도록 했던 것이다. 루이 16세의 예상은 적중했다. 농민들은 이 작물이 매우 귀한 것이라 여기고 몰래 왕실 정원에 잠입해 감자를 훔쳐 재배하는 일이 번번했다. 덕분에 감자가 보다 널리 보급됐고, 농민들의 영양실조와 기아 현상이 줄어드는 결과를 가져왔다. 영국이 프랑스와 나폴레옹 전쟁을 치르면서 극심한 식량난을 겪었는데, 이때 곡물 가격은 치솟았고, 식량은 턱없이 부족했다. 저렴하면서도 영양 높은 감자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후 감자는 영국에서 주식으로 자리 잡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