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함은 '발견되어야' 하는 것이다.
유튜브는 항상 내가 무심결에 놓치는 주제를 제대로 들여다보라는 듯 끊임없이 새로운 영상을 내어준다. 그중에는 다정함에도 '각자의 방식'이 있다는 주제의 영상도 있었다.
영상을 시청하다가 다정하다는 말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고 싶어 국어사전을 찾아보았다. 사전은 '정이 많다'라고 설명한다. 역시 사전답게 설명이 너무 납작하다 보니, 보통 어떻게 행동할 때 다정하다고 말하는지에 대해 생각의 초점이 자연스레 옮겨갔다.
순전히 나의 경험을 참고해서 판단하자면, 어떤 사람이 단순히 잘해준다고 해서 그 사람이 다정한 사람이라고 말하지는 않는 것 같다. '다정함'은 잘해주는 것 이상으로 보이지 않는 '방식'들에 의해 한층, 한층씩 겹겹이 쌓여있는 느낌을 준다. 모든 사람들은 한결같이 똑같은 방식으로 다정함의 조각들을 쌓아 올리지 않을 것이다.
처음에는 단순히 나 자신이 다정한 사람인지에 대해서만 찬찬히 되짚어보다가, 문득 다정함은 '발견되어야만' 그 진가가 온전히 발휘되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다정하다고 말하는 화자는 '다정함을 받는 사람'이다. 즉, 땅에 묻힌 진귀한 보석을 발굴하듯이 어느 한 사람의 스쳐가는 무수한 말과 행동 중에서 다정함을 찾아낼 수 있기에 그 사람이 다정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다정함의 진가가 발휘되는 때는 티 날 듯 말 듯 은밀히 건네는 다정함이 어떤 방식이든 간에, 자신을 위한 다정함인 줄 알고 받아줄 때다. 다정함은, '상대방을 온전히 중심'에 둘 때 우러나오는 것일 테다.
세심한 관심과 사려 깊은 걱정을 손수 접은 종이학을 그러모은 듯한 말 한마디를 조심스레 건네는 누군가는 다정한 사람일 것이다. 말하지 않더라도 은은한 햇볕 같은 따스한 시선을 마주치는 눈을 통해 고스란히 흘려보내는 누군가도 다정한 사람일 것이다. 참을 수 있는 한계를 넘는 고난에 힘들다고, 깊은 고뇌가 녹아든 한탄을 털어놓는 사람의 곁에서 묵묵히 그 한탄을 들어주는 누군가도 다정한 사람일 것이다.
앞으로 일상 속에서 무심결에 놓치기 쉬운 다정함의 형태들에, '다정하다'는 언어의 라벨을 살포시 붙여보기로 했다. 동시에, 내가 건넬 수 있는 다정함의 방식에 대해서도 고민해보려 한다. 나의 다정함은 어떤 형태면 좋을까?